역사가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설명한 이후 묘족(苗族)과 한족(漢族)이라는 비아가 있지 않았다면 삼경(三京)과 오군(五軍)을 두지 않았을 것이라며, 박기봉 역 조선사(조선상고사) P. 27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당 내용에 대해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조선사(조선상고사)에는
삼경(三京) : 고려시대 개경을 비롯한 세 서울, 초기에 개경 서경 동경 이었으나 후에 동경 대신 남경(서울)으로 변경하였다
오군(五軍) : 확실치 않으나 임진왜란 후의 오군영(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수어쳥)을 말한 듯, 참고로 고려시대에는 2군 6위제도 조선 초에는 5위제도로 알려져 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어 보면, 박기봉역 조선사(조선상고사) P.35에 고려사 열전 김위제전을 인용하면서 신지비사의 남은 구절 중에 부소량, 오덕지, 백아강 이라는 삼경(三京)을 설명하고 있고, P.97에 2편 2장 3 의 제목에 신수두의 삼경(三京)과 오부(五部) 제도를 설명하면서 출진도를 그려가며 역시 5군(五軍) 제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조선사(조선상고사)에는 그림은 없습니다. 역사의 아침 출판사 김종성 역본에도 자세한 주석이나 그림은 없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조선사(조선상고사)가 초판이 1983년에 나왔네요. 해당 서적은 고(故) 이만열 숙명여대 교수께서 주석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P.97의 그림은 박기봉 님이 첨가했다고 하더라도 삼경이나 오군에 대해서 단재 선생 시대와 1980년대 역사연구와의 격차라고 해야 할까? 뭐 그런 것이 느껴지네요.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고대사를 연구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모습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확실치 않다고 쓰기는 또 썼네요.
조선사 서술 요목에
(카) 지방자치제가 태고부터 발생했으면서 근세에 와서는 형식만 남고 정신은 사라져 없어진 원인은 무엇인지
라고 적혀 있는데, 이만열 교수의 주석대로라면 고려시대까지는 삼경(三京)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태조 이성계의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확실히 중국식 제도가 안착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역사를 잘 모르지만, 한민족(韓民族)이 중국과의 충돌에서 깨진 것이 지방자치제(지방분권제)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 단순히 행정체계만 지방분권화 된 것이 아니라 군사조직도 분권화 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조선왕조 태종 임금님때 사병혁파의 사례를 보면 꽤 오랫동안 중국과 달리 우리 민족은 중앙집권화 되지는 못했나 봅니다. 고당전쟁에서 패하고서도 발해(대진)나 고려는 칭제건원 했다지만 조선시대에 와서 사병을 혁파한 것으로 보아 여전히 지방자치적인 성격이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구려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망하게 된 것이 신라가 당나라에 동조한 것도 원인일 수 있지만, 고구려의 무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군사조직이나 행정조직 등이 중앙집권화 되어 있지 않으므로 해서 당 태종이 시전한 여러 이간책이 먼저 통했다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중앙집권화 되어 있지 않아서 이해관계가 상충한다는 것을 간파했다는 것이겠지요.
조한전쟁(고조선 VS 중국 한漢 나라)이후 한민족(韓民族)이 점점 약세가 되어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결국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게 되는 것이, 고구려 시기부터 중앙 정부는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전환하려 했으나 우리 민족 자체가 중앙집권을 선호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중앙 정부와 지방 세력간의 갈등이 계속 지속된 까닭으로 외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 아닌가? 싶네요. 게다가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문치를 더욱 강조한 까닭에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도 겪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이라도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조차 없었다고 하던데, 그렇게 보면 문치(文治)를 이룬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