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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두 조류

참그놈 2021. 2. 19. 01:11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이 생겨 역사 관련 서적을 읽어보려 하면 뜻하지 않은 상황을 겪게 됩니다. 그것은 주류사학과 재야사학이라는 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구분은 식민사학과 민족사학이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또, 반도사관과 대륙사관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 외에 환단고기를 추종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류사학이 말하는 우리 역사는 한사군으로부터 시작하고 우리 역사 연대를 2000년 정도로 잡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한반도 밖으로 진출해 본 적이 없는 국가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반면, 속칭 재야사학이 말하는 우리 역사는 만주와 한반도가 고대 우리민족의 역사 무대였으며 그 연대가 최소 5000여년은 되지만, 오랜 외침으로 백두산 이남으로 위축된 상황이다 라고 우리 역사를 설명합니다.

 

우리 역사에 관해서 왜 이런 분열적 사고가 형성이 되었는지 그 까닭은 또 무엇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두 진영(구분)이 너무 첨예함으로 도무지 그 까닭이 뭘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시간적으로 3000년이라는 격차가 생기고 공간적으로 만주 일대가 포함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이니까요. 온라인 서점에서 식민사학이라거나 유사역사학이라거나 하는 검색어로 검색을 해 보면 적지 않은 책들이 검색됩니다. 학설로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전을 보는 느낌이 듭니다.

 

대륙으로 진출을 했는지 말았는지 모르지만 2000년과 5000년만 보아도 차이가 나도 너무 납니다. 그리고 통상 우리가 반만년의 역사라고 누구든지 말을 할텐데, 그 말이 사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와는 3000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또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2000여년 정도밖에 안되는데 평상시 쓰는 말로는 반만년의 역사라고 하니까요. 반만년은 5000년입니다. 2000년 아니지요. 30대 이상은 단군을 배운 적도 없는데 무슨 큰 사건이 생기면 단군이래 처음이다 라는 말도 하지요. 학교에서 배운대로라면 한사군 이래 처음이다 라고 해야 되는데,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조선은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고 했습니다. 조선의 자긍심 같은 것이었는데, 유학의 법통까지는 몰라도 계통을 이었다 라는 뜻이 담겨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학을 국가통치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 바로 한(漢)나라입니다. 그 이후로 들어서는 모든 중국의 왕조가 유학을 통치의 기반으로 삼습니다. 유학이 제시하는 이론 중에 하나가 화이론(華夷論)인데, 한마디로 문명인과 야만인(오랑캐)의 구분이 있는 겁니다. 유학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기에 조선은 오랑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뭐 그런 사상이 바탕에 깔려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역사가 진행되면서 만주 일대의 거란, 말갈, 여진 등등의 족속들은 모두 망했습니다. 심지어 현재는 만주어까지 거의 사라진 상황이지요?

 

한나라가 사군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만약이지만 한나라가 한사군을 설치하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는 한사군으로 시작하지 않았을 겁니다. 혹시나 뒤에 일어선 왕조 중에 수나라나 당나라 또는 송나라 등에서 수사군, 당사군, 송사군 등을 설치했다면 그때부터 우리나라 역사를 기술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때서야 문명인이 될 수 있는 교화가 시작되는 셈이니까요. 혹시나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일으키지 않고 반대로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면 진시황 시기로 우리 역사를 올려 기술했을 수도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성서(Bible)의 가르침이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서 해야 할 도리를 가르치는 기준이었다면 동양에서는 유학이 곧 사람이 사람이기 위한 기준이었지요. 그런 사람이 야만인이 되지 않고 문명인으로 되기 위한 가르침인 유학을 한나라가 국가통치에 활용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우리 민족은 오랭캐와 같은 야만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와 달리,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고조선으로부터 잡고 5000여년, 즉 반만년을 이어온 것으로 설명하면 애배애미도 없는 야만적인 행태 - 유학에서 그렇게 설명을 해요. 오랭캐라서 임금도 부모도 없다 - 로 가득한 무뢰배가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대국을 향한 도전이나 망발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서운관, 춘추관? 등 조선의 궁궐 내에 옛날 역사서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전란을 겪으면서 모두 타버렸지만. 우리 고대에 관한 역사서를 가지고 있었어도 함부로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는 뜻이 됩니다. 고려만 해도 관제나 뭐 기타 여러 가지를 보면 자주국을 표방했거든요.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는 것처럼 동양에서도 두 개의 자주국이 있으면 곤란한 뭐 그런 형국이었던 것이지요.

 

조선왕조 시기에는 왕조시대였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청나라도 망했고 조선왕조도 이미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했지요. 그런데도 아직까지 유학의 교화를 찬양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의 국사교과서는 유학의 교화로 - 한사군 - 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쓰신 을지문덕전을 봤더니 한국 출판계의 효시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을지문덕전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판되는 책의 50%는 조선왕조를 찬양하는 글, 30%는 유가 경전과 관계있는 책, 나머지 20%는 이백, 두보와 같은 시문들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자신에 관한 책들은 전혀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을지문덕전이 한국 출판계의 효시라고까지 했다는군요. 조선왕조는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사대하였으므로 최소 80%의 서적들이 모두 유학 관련 서적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떡하니 을지문덕전이 출판되었으니 놀랄만도 했을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는 문을 닫았다지만 625 이후에도 유교적 사고는 생활 곳곳에 남아 있어서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가정의례준칙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요즘 초상이 나면 3일장 또는 5일장 등을 하지요? 제가 알기로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초상집에 한 번 가면 1주일이고 2주일이고 업무에 복귀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요즘은 워낙 여러 나라들과 교류가 활발해져서 제가 어릴 때의 모습과는 또 다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의 사서를 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사서는 어쩌다 보니 한 번씩은 읽어 봤거든요. 아직까지 유학은 건재하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럼에도 현대에 태어나서 그런지 유학은 유학이고 역사는 역사라고 하고 싶네요.

 

 

우리 역사에 대해서 대강이라도 알려고 했다가 뜻하지 않은 분열을 목격하고, 양대진영의 너무나 큰 격차 때문에 - 2000년 VS 5000년, 한반도 VS 만주와 한반도 - 왜, 무엇때문에? 라는 생각으로 저 혼자 짱구를 굴려본 것입니다. 순전히 저의 뇌피셜이라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