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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디지털 후진국이라고? 그런데, 그게 왜 문제야?

참그놈 2021. 4. 1. 16:44

최근 코로나 사태로 일본의 행정력이 매우 느리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그것이 일본에는 디지털 인프라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데다 일본 국민들 개개인도 아날로그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령, 아직까지 도장을 쓰고 있다거나, 과학분야 장관이 USB 라는 말조차 모른다거나, 은행에서 아직까지 플로피 디스켓(Floppy Diskette)을 쓰고 있다거나 하면서, 일본의 낙후된 IT 인프라 상황과 디지털이라는 부분에서의 일본 국민들과 일본 고위공직자들의 인식 등에 대해서도 많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진정 IT 후진국일까요? 그리고 일본이 IT 후진국이어서 그걸 비판하거나 비난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유튜브에 업로드 되는 일본의 IT 환경과 관련한 영상을 보고 저 역시 놀라는 경우도 사실은 있었습니다. 2020년인데도 은행에서 플로피 디스켓(Floppy Diskette)을 저장장치로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진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듯한 그런 느낌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본이나 일본 은행을 향해 이제는 플로피 디스켓을 쓰면 앙대요 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플로피 디스켓(Floppy Diskette)을 모르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4~50년 전부터 쓰고 있던 저장장치로 우리나라에서도 서기 2000년 정도가 되면서 서서히 사라진 저장매체입니다. 손바닥 만한 크기에 장당 1MB (메가바이트입니다. 기가바이트 아닙니다) 정도의 용량이었고 속도가 매우 느렸습니다. 오류가 자주 나기도 했지요. 영화 한 편을 다운로드 받으면 적게는 1GB에서 고화질로 제작된 영화는 10GB가 넘는 것도 있지요? 만약 10GB짜리 영화 한 편을 저장하려면 플로피 디스켓 1만장 정도가 필요한데, 아마 라면 박스 분량으로 몇 개는 있어야 될 것입니다. 10GB짜리 영화 한 편을 플로피 디스켓 1만장에 저장하려면 몇 일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서 플로피 디스켓을 바꿔 끼워야 됩니다. 플로피 디스켓 한 장 기록하는데 1분 정도로만 잡아도 10000분이 되는데, 10000분이면 몇 시간이지요? 계산이 힘드네... ㅡㅡ  그나마 그것은 순전히 기록하는데만 걸리는 시간이고 순차적으로 플로피디스켓을 바꿔 끼우고, 표면에 번호를 붙여서 순서가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1만장 중에 단 한 장이라도 디스켓에 오류가 나면 10GB 영화 한 편이 날아가는 몹쓸(?) 저장매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 10GB가 아니라도 1GB 짜리 영화를 저장하기 위해서 플로피디스켓을 쓰고 있을까요? 1GB도 아니고 몇 백 메가짜리 영화라도, 영화나 고음질 음원을 저장하기 위해서 플로피 디스켓을 쓰는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건 제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영화나 MP3, OGG, Flac 같은 파일들을 플로피 디스켓에 저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친 놈일 것이 분명하거든요.

 

우리나라 인터넷 속도가 세계에서 제일 빠르다고 합니다. 게다가 서울이던 지방이던 공공 와이파이도 매우 잘 지원이 되어서 대한민국의 인터넷 속도를 따라올 나라가 없다고도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스마트폰을 통해서 영화를 볼 수도 있고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게임도 할 수 있고, 기타 공무도 볼 수 있고, 기업 업무, 길 안내나 은행 업무 등등 정말 많은 것이 편리한 것이 사실입니다. 뭐 부정할 수 없지요.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군대에 계급이 있듯이 어느 나라 어느 사회던지 계층적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상위로 올라갈수록 저용량 파일을 주로 취급합니다. 또 상위로 올라갈수록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에 보다 가까운 모습이 됩니다. 빈센조 까사노라는 드라마에서 빈센조 까사노의 책상 위에 수북히 쌓인 문서들 보셨지요?

 

빠른 인터넷을 쓰다가 브라우저가 빨리 열리지 않는다거나 느리다거나 하면 답답하지요? 너무 답답한 나머지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입에서 쌍욕이 나오기도 하고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던가요? 틱낫한 스님이라는 분이 느리게 사는 삶을 말하지 않아도 사람은 누구나 여유있는 삶을 원할 것입니다. 금전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정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얼굴이 붊어지거나 쌍욕을 하거나 하는 일이 잘 없지요. IT 인프라로 생활이 편리해졌고 그에 따른 여유를 우리는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종의 상황으로 세계에서 제일 빨랐던 인터넷이 어떤 순간에 일정기간 끊기게 된다면 그 때에도 우리는 여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일본인들은 카드 사용보다 현금결제를 훨씬 더 선호한다고 합니다. 일본 전역에 자판기가 그렇게 많다고 하더군요. 모두 동전이나 지폐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합니다. 신용카드를 잘 사용하지 않고 자판기에 쓸 현금 등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면서, 스마트폰과 신용카드 한 장 달랑 들고 다니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일본은 IT 후진국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예로부터 지진이나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재해가 잦은 나라입니다. 그로 인해 쓰나미 등의 피해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2011년 후쿠시마 대지진 같은 경우 뉴스 영상을 통해서 그 실상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미운 나라 일본이지만 처참했지요. 일본이 모종의 자연재해로 전기를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해 질까요? 이는 비단 일본 뿐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나 똑같습니다. IT 환경의 전제는 전기인데, 모종의 자연재해로 전기가 끊겼을 때 무엇으로 어떻게 결제할 수 있나요? 현금입니다. 동전이나 지폐 또는 금이나 은. 일본인들이 신용카드보다 현금을 선호한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할 수 있나요? 매일 지진이 난다고 해도 되는 나라인데...

 

얼마 전 미국 텍사스에 한파가 몰아쳐 미국 텍사스 주에 전기가 끊긴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망한 사람도 있었고 전기세도 2배나 3배가 오른 것이 아니라 10배 이상 올랐다고 하는 것 같더군요. 미국 텍사스에는 전기 공급을 아마 민간기업이 하지요? 즉, 전기 요금이 평상시에도 비싸다는 말인데 위기상황이 되었으므로 그러지 않아도 비싼 전기세가 10배이상 올랐다면 전기세 폭탄을 맞은 것이나 진배없을 겁니다. 전기가 없는데 영화? 음악? TV? 뭐가 가능했을 것 같습니까? 한파가 닥쳤는데도 난방조차 할 수 없어 땔감을 구하러 다녔다는데...

 

한편, 펜데믹 상황과 올림픽 준비에 대한 부분 등에서 IT 인프라가 낙후된 것으로 발생한 여러 문제들과 현금을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사고방식 때문에 문제가 제기된 것은 맞습니다. 2020년에 도쿄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결정된 때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최소 10년 전이라고 한다면 그 때만 해도 IT 환경이 이렇게나 급격히 발전할 지 예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뿐만 아니라 IT 인프라 면에서는 미국이나 유럽 역시 대한민국만큼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즉, 미국이나 유럽 등과 함께 견주어 보면 일본만 IT 후진국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유튜브 영상들 보시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한국에 왔다가 자국으로 돌아가서 제일 답답한 것이 인터넷 속도라고 말합니다. 일본만 느린 것이 아니라 세계 각국이 다 느린 겁니다. 그럼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IT 후진국인 것인가요? 일본이 IT 후진국인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우리나라만 유독 세계 여러 나라에 비해 IT 인프라가 잘 갖추어 진 것은 아닐까요?

 

저는 일본이 IT 후진국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 2021년 4월 1일 현재 매일 발생하는 지진으로 일본 국민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다고 하는데, 자연재해가 빈번한 일본의 자연환경을 고려하면 팬데믹 상황이나 올림픽에 대비해 신용카드 결제 시스템 등이 미비하다고 해서, 부분을 보고 일본 전체를 낙후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오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IT 인프라가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했을 때, 일본을 향해 IT 후진국이라고 평가하지만, 일본이 IT 인프라 구축에 성공한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될까요? 그러잖아도 세계 최고위의 경제 대국 중 하나인데 IT 인프라까지 갖추어서 그런 일본의 국가경쟁력이 더욱 상승한다면... 

 

11억 거지떼(?)를 위시해서 아시아는 가난했습니다. 도장을 썼기 때문에 아시아가 가난했을까요? 도장은 서양에서도 썼습니다. 도장이 동양만큼 보편적이거나 다양하게 쓰이지 않았더라도 서양에서 도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은 못하지요. 도장은 수 천년 아시아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동양화에 도서(낙관, 도장)가 많이 찍힌 것일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가난에 허덕이던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달리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경제대국이 되었고, 사전을 편찬하는 나라가 되었으며, 동양 문화의 정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인장(도장) 문화 역시 유지하고 있습니다. 기업 결제 환경에서 순차적으로 반드시 인장을 받아야 하는, 그리하여 뭐 저런 나라가 있냐?, 라는 말을 듣게도 되었지만, 수 천년간 이어져 오던 동양 문화의 정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인장문화는 일본의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자부심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일본이, 그리고 일본인들이 각성하여 IT 인프라 구축에 성공한다면, 그리고 일본의 공공기관이나 기업 결제 부분에서 도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행정력 뿐만 아니라 기업들 역시 경쟁력이 상승하게 되는 바탕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일본 그만 놀려요. 오히려, 그 보다는... 빠른 인터넷 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못쓰게 되는 경우 한국인은 정서적으로 여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그런 면을 되돌아 볼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요? 항상 보면 삶에서의 여유는 아날로그나 엔틱을 매개로 표현되는 것 같더군요. 보다 여유있는 사람들일수록, 금전적이든 정서적이든, 고물처럼 보이는 가구나 바늘이 있는 시계, 편지와 만년필 또는 펜 같은 것으로 표현되는 것 같던데, 즉, 디지털은 아날로그(여유)를 위한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