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트에 기록하는 내용은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는 그저 블로그 운영자의 생각일 뿐입니다. 카테고리도 공상록이랍니다. ^^
현재의 중국(China) 역사에는 춘추전국시대라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BC770~BC220년 정도의 대략 550여년 정도의 기간인데, 그 기간 중 앞부분 절반 정도는 춘추시대이고 후반부 절반은 전국시대라고 구분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주(周)나라 때인데 주나라는 봉건제 국가였습니다. 대표적으로 12개 정도로 대표되는 제후국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요즘과 달리 나라(國)의 개념이 달라서인지 아주 많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국가의 규모에 대해서는 예기 왕제편 등을 읽어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12제후국 중에 연(燕)나라 라는 나라도 있었습니다. 주 무왕이 동생 소공 석을 연(燕)에 봉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 지도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제후국 연나라의 위치가 너무 생뚱맞은 위치로 생각되는 까닭은 뭘까요? 지도를 보면 춘추시대의 대표적인 제후국들과 달리 연나라는 멀리 동떨어져 있습니다. 물론 초(楚)나라나 오월(吳越)도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초나라나 오월은 주나라로부터 초기에는 오랑캐 취급을 받던 나라들이었습니다. 소공 석의 지위 등을 감안하면 초나라나 오 월은 나중 문제인 것인데, 현대를 사는 우리는 연나라가 처음부터 북경 근처에 자리를 잡은 것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각한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춘추전국시대가 지나고 진시황 시기도 지나고 중국에 한(漢)나라가 들어서고서도 중국 한나라는 한동안 안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았다고 하더군요. 제후국들의 군사적 역할이 외침을 막는 것이라면 연(燕)은 여타 제후국들과 상호협력이 힘든 위치에 있는 겁니다. 주무왕이 동생을 미워서 죽이려 하지 않았다면 보내지 말았어야 할 위치로까지 생각됩니다. 물론, 봉건시대에 가장 외곽에 봉하는 이들은 왕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가장 신뢰할만한 사람을 보내기는 합니다. 그러나 다른 제후들과 공조가 불가능할만큼 멀리 떨어져 고립되는 위치로 보낸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만약이지만 춘추시대 연나라의 봉지가 위 지도에서 표시하는 위치가 맞다면 주변 이민족들의 침공을 받지 않는 지역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 오른쪽에 연나라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강대한 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조선(古朝鮮) 같은... 그리고 유대관계도 강격했다는 말일 수도 있고요.
사마천 사기에 주 무왕 당시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내용이 있답니다. 그게 BC. 1100년경이라고 하는데, 주 무왕때에도 분명히 조선(朝鮮 : 古朝鮮)이 실존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BC 1100년경부터 중국 한(漢)나라 초기까지 거의 1000여년간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으므로 제후국들과의 상호협력은 고사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당시의 중국 즉, 주(周)나라로서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 다음과 같은 지도도 있습니다. 아래 지도는 삼국연의를 읽다가 관련 검색을 하는 중 인터넷에서 발견한 지도입니다. 낙양(洛陽)의 위치 때문이었는데, 물은 북쪽을 양(陽)이라 하고 산은 남쪽을 양(陽)이라고 합니다. 보통의 지도에서 낙양을 강줄기 밑에 표시하고 있어서, 이상한데? 라는 깜냥으로 그냥 검색을 한 것인데, 낙읍이라고 표시된 녹색점 바로 밑에 물줄기가 하나 보이시지요? 낙읍 아래에 있는 물줄기도 낙수(洛水)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아래 지도에 연(燕)이 분수 위에 표시되어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위 두 개의 지도를 보았을 때, 춘추시대 연(燕)나라의 위치는 아래 지도에 있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래야 이민족이 침략하는 경우 제후국들간에 상호 협력이 가능한 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구글 어스 등의 지도를 펼쳐서 척도 등을 따져보면 춘추시대 당시의 주나라 도읍과 연나라의 거리가 첫번째 지도의 경우 직선거리로만 1000km 정도 됩니다.(첫번째 지도의 경우 척도가 표시되어 있으므로 대략 자로 재 보세요) 하지만, 당시의 도로 사정을 알 수 없으므로 실제로는 몇 백 km는 더 추가해야 될 겁니다. 두 번째 지도의 경우도 주나라 도읍과 연나라의 거리가 직선 거리로만 500km는 넘는 것 같네요. 그러나 첫번째 지도의 경우는 여타 제후국들과 상호협력이 힘든 위치에 있는 반면 두 번째 지도의 경우 다른 제후국들과 공조가 가능한 거리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삼국연의를 읽다가 생각한 것인데, 숱한 영웅들이 있지만, 진정한 영웅은 당시의 보병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냥 1회만 읽어봐도 유비가 탁군에서 청주로 청주에서 광릉으로, 광릉에서 영천으로, 영천에서 또 다시... 그렇게 이동한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유비 관우 장비야 말이라도 탔지. 보병들에게 무슨 말을... 게다가 갑옷에 무기도 들어야 했을 것이고... 진정 슈퍼맨들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쉬울까요?
최소한 걷는 것을 한 달간만이라도 해 본 뒤에 삼국연의를 읽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칼이나 창, 갑옷의 무게를 고려해야 하므로 맨몸으로 걸으면 안되겠지요? 요즘 같은 최신형 리어카 바퀴도 아니고 나무 바퀴로 만든 수레까지 있다면... 에잉.. 뭐 그건 빼십시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 역시 삼국연의를 전혀 읽지 않은 쪽에 속하게 되기는 합니다. 하루에 몇 km를 걸어야 할까요? ㅡ,.ㅡ
공수특전사들도 1000리 행군 하는데 10일간 이동한다고 하더군요. 1000리는 400km 그러면 하루 40km씩을 매일 걷는다는 것인데, 맨몸으로 하루 40km씩 매일 걸어야 할까요? 하지만,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서 50만 대군을 이끌고 미얀마 라오스 접경지역까지, 구글 어스 펴 보면 사천 성도에서 미얀마 라오스 접경지역을 보면 산으로 빽빽한 곳인데, 중간에 옹개 등에 관한 일처리를 해가며 왕복하는데 5개월이 걸리지요? 사마의도 요동정벌 하면서 4000리 길 즉 1600km를 100일만에 가지요? 그래도 그건 하루 행군 거리가 16km 밖에 안되긴 하네요.
중국에서 실험 한 번 해 봤으면 좋겠네요. 현대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50만명을 이끌고 사천 성도에서 미얀마 라오스 국경지역(영창군?)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릴지... 그런데 그런 실험은 절대로 안하겠지요? 실제 정사에서는 맹획이라는 이름조차 없고 주석에 있다던데, 우리는 삼국연의를 삼국지로 생각하고 살고 있으므로...
어릴 때는 교과서나 기타 책에 위 지도처럼 표시를 하니까 그냥 그런가 하고 배웠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안되어서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한 것이 중국은 역사지도에서 가장 최종적인 것을 처음부터 그리 된 것으로 오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연나라의 최초 위치는 지금의 북경 근처가 아니라 위 지도에서처럼 분수 위에 있을 수도 있지만, 이민족과의 갈등으로 여기저기 옮겨다니다가 한나라 무제 이후 확실히 강역이 넓어지자 원래부터 연나라가 북경 근처에 있었던 것 마냥 지도에 표시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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