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원문/삼국사(삼국사기)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원문 (백제가 수상하네...)

참그놈 2021. 10. 22. 17:18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오피스(ODT) 파일입니다.

 

삼국사기 권 24 백제본기 02.odt
0.02MB

 

백제본기는 신라본기의 절반밖에 안되지만 의아하게 생각되는 부분은 더 많습니다. 아래 스크린샷 보시면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서 산이 무너진 곳이 40군데나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해당 기사가 신라본기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백제와 신라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신라본기에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 의아하네요. 물론 가야가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 있었습니다만 AD42년에 건국하여 180여년이 지난 시점인데 하필 산이 무너진 곳이 가야와 국경을 마주한 부분이었을까요? 그러나, 산이라는 것이 아무리 작아도 40여곳이라면 그 범위가 제법 넓어서 신라의 서쪽 산 곳곳에 산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을법한데 보이지 않네요. 또, 신라가 가야를 병합했다면 기록이 남아있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AD220년 무렵 가야는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알 수가 없기도 합니다. 김부식 당시에는 가야에 대한 기록이 지금보다 더 많이 남아 있었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해당 기사가 신라본기에 보이지 않는 것은 이상하네요.

 

 

사냥을 50일이나 했다는 이야기인데, 왕이...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 고대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나누어 사냥을 군사훈련삼아 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 혹시 사냥을 핑계로 대규모 군사훈련을 한 것일까요?

 

 

유성이 떨어져서 화재가 났다는 기사도 있네요. 유성이 떨어져서 화재가 날 정도면 얼마나 큰 유성이었을까요? 보통은 유성이 떨어지면서 모두 타버리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아래 스크린샷에 모두 황색깃발을 썼다는 기사가 있는데 그 아래에 사진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을 함께 쓰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황색깃발 또는 황색 용포 등은 황제만 쓸 수 있는 색깔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래 스크린샷을 보시면 고흥이 서기(書記)를 지었다고 했고 그 이전에는 한자(漢字)를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자를 쓰지 않았는데도 황색깃발을 쓴 것을 김부식이 기록을 했습니다. 아래 기사가 쓰여진 것이 4세기 후반인데 신라는 진흥왕 법흥왕 등을 거치면서 당나라의 제도를 따랐다는 내용들이 있는데 시기적으로 근초고왕보다 200여년 후입니다. 신라는 황색 깃발 같은 것을 쓰지 않았겠지요? 그렇다고 신라가 백제의 제후국이었던 것 역시 아니었습니다.

 

 

김부식이 백제본기에 황색 깃발을 썼다는 내용을 적었다는 것은 황색이 황제를 뜻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텐데, 그렇다면 근초고왕 때는 그런 것을 몰랐을까요? 그 외에도 369년보다 100년도 더 이전 기사에 백제는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다는 기사가 곳곳에 나옵니다. 시조 동명묘에 참배한 것은 고구려의 지파라는 뜻일텐데 지파이면서 백제가 황색깃발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또 고구려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또 고구려의 예식이나 뭐 그런 것은 설명이 없기도 하더군요. 황색 깃발을 썼는지 등등.

 

광개토대왕비에 출자북부여(한자생략) 라고 해서 추모왕이 북부여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구려 초기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소서노라는 유력가의 딸과 혼인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소서소는 부여에 대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는 뜻은 아닐까요?

 

 

백제본기는 6권으로 신라본기가 12권인데 비하면 권수로는 절반 분량인데, 희안하게 일개 서민의 입장에서 백제본기가 아리송한 부분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