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중은 요동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는 있었을까요?
삼국연의 33회에 조조가 원소의 세력을 까부수고 곽가의 계책을 따라 오환을 공격하려 합니다. 그리고는 길을 떠나지요. 무려 수레 1천량을 끌고서. 그런데 사막에서 별 고생을 다합니다. 그리고 결국 곽가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맵니다. 조조가 과연 용병의 달인이 맞을까요? 정사(正史)에서는 손자병법 주석도 달았다고 하던데.
지피지기라야 백전불태라고 했습니다. 적이 어디 있는지는 고사하고 요동이 어디있는지 몰라서 사막을 헤매다 - 어디로 가는 지 모르니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는 말 이상은 아니지요 - 부하 중 제일 젊은 곽가가 병까지 나서 더 이상 동행할 수 없게 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조조가 가장 아끼던 모사라고 하더군요. 곽가는. 자기가 죽은 이후 후사를 맞기려고까지 한... 손자병법에도 구지(九地)에 대해서 나옵니다. 지리는 병법과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기가막힌 건, 곽가가 다 죽어가면서 조조에게 회군하지 말고 그대로 계책을 진행하라고 하면서 경기병만 데리고 가라고 합니다. 조조가 오환을 공격하기 위해서 동원한 군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경기병이라면 일단 말을 탄 군사들만을 말합니다. 몇 명이나 갔을까요? 원소의 두 아들을 만났을 때 오환의 병사는 수만이라고 나오는데, 하긴 기병이 보병에 비해서 워낙 전투력이 뛰어나기는 합니다. 그런데 오환의 군사들은 모두 보병이었을까요? 유목민들이...?
높은 데서 딱 한 번 보고 대오가 정연하지 못하다. 라고 하니까 장료 및 장수 몇 명이 네 갈래 길로 공격해서 오환을 무찌르고 이깁니다. 그리고 정작 원소의 두 아들은 요동으로 가지요. 어? 그럼 조조가 갔던 곳은 요동이 아니었나보네... @@?
그런데 왜 조조 요동정벌로 검색을 하면 곽가의 계책과 함께 오환과 싸운 이야기가 나열이 될까요?
조조가 오환과 싸우기 전, 그러니까 곽가와 함께 사막을 헤매다가 길잡이를 맞아들입니다. 전주(田疇)라고 합니다. 이 전주(田疇)는 어디에서 나타났을까요? (이하 전주)
조조와 그 장수 및 군사들이 사막에서 뻘짓을 하다 곽가의 추가 계책을 듣고 전주를 블렀는데, 전주가 대뜸 하는 말이 "물이 얕아도 말이 건너기 힘들고, 물이 깊어도 배를 띄울 수 없다." "노룡구를 지나서 백단의 험준한 곳을 넘어거서 또 유성으로 간 다음...." 운운합니다. 전주가 말한 곳이 사막인가요? 삼국시대에 만주 지역이 사막이었나요? 곽가와 함께 사막을 헤매다 전주가 나타나자마자 뜬금없이 만주지역이 나타나는 겁니다. 사막에서 만주로 일변... 도대체 요동으로 가는 길은 어디인가?
돌아오는 길도 희안해요. 유성에서부터 돌아오는데 200리를 행군하여도 먹을 물이 없었다? 물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3~40장을 팠다. 당시 1장은 2.3M 정도인데, 70M~90M를 팠다? 땅 파다가 갈증나서 다 뒤졌겠네... ㅡㅡ
날이 가물었다는 배경 설명이 있지만, 가물어서 물기 없는 땅을 70~90M를 판다고...? 그런 비법은 2020년인 지금도 통하지 않을까요? 얼마나 넓게 또 얼마나 깊게 팠을까요?
포스트 작성하면서 다시 읽어 보니까, 경기병이라는 말은 아니네요. 수레를 놔두고 몸을 가볍게 해서 가라고 했는데, 기병이 아니라 보병이래도 말이 안되지. 먹을 건 어디서 구하고...
당시의 기후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추정만으로 모순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좀 과장이 심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보면 나관중은 요동이 어디에 있는지 기후는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나관중은 정체불명이라서 본적이 북경 가까운 곳이라거나 장강 가까운 곳이라거나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조와 곽가의 오환 공격 부분을 보면 요동이 어디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몰랐던 사람 갔습니다. 하북성이나 산동성 산서성 등지 사람이었다면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텐데요.
삼국지와 관련해서 지도를 검색해 보면 더욱 가관입니다. 만주를 지나서 한반도 북부까지 한나라가 영토 확장을 한 것으로 되어 있거든요. 원말명초 사람인 나관중 조차도 요동이 어디인지 몰랐던 것 같은데... 중국의 문맹률이 80~90%에 이르렀던 것을 감안하면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조차 몰랐다는 것은 - 책을 읽는 것과 쓰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더구나 원말명초는 원명교체기라는 전쟁통입니다. 문맹률이 더하면 더했지... 어떤 면에서 역사지도 라는 것이 정말 믿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조차 들기도 합니다.
이건 이 포스트랑 무관하기는 하지만... 혹시 아세요?
한나라가 280년엔가 망해요. 삼국시대가 끝나고 晉나라가 들어서지요. 그런데 한사군漢四郡은 313년까지인가 계속 한반도에 있는답니다. 우와~~~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정설이지요.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이 있어도 한사군이 313년?까지 한반도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더군요. 한漢나라는 몇 십년 전에 벌써 망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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