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원문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원문

참그놈 2021. 1. 22. 08:28

출사표를 아시지요? 제갈량이 지었다는 제갈량의 전출사표와 후출사표. 한문에는 여러 가지 글의 형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표(表)라는 글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한 형식을 말하는데, 표(表)는 제후국의 왕에게 올리는 글이 아니라 자주국의 임금에게 올리는 글입니다. 즉, 중국식으로 따지면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말하는 겁니다. 옛날 중국에는 황제 외에도 군데군데 왕이 있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조조도 위왕(魏王)이 되기도 하지요? 그런 왕에게 올리는 글을 표(表)라고 하지 않습니다. 조조라는 위왕 위에 헌제가 있었으니까요. 삼국시대 때 중국에서는 헌제가 최고 높은 임금이었거든요. 즉, 표(表)는 최고 높은 임금에게 올리는 글입니다.

 

아래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원문은 예전에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았던 파일과 한국학 자료센터의 글을 비교하여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저 역시 내용이 궁금하여 구한 것이라서 정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kostma.aks.ac.kr/classic/gojunTextView.aspx?dataUCI=G002+CLA+KSM-WU.1145.0000-00000000.0004&dataId=0004_000_002_001

 

한국고전원문자료관

 

kostma.aks.ac.kr

 

進三國史記表

 

輸忠定難靖國贊化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事, 兼吏禮部事, 集賢殿太學士, 監修國史, 上柱國致仕, 臣金富軾伏言, 古之列國亦各置史官, 以記事. 故孟子曰, 晋之乘, 楚之檮杌, 魯之春秋, 一也. 惟此海東三國歷年長久, 宜其事實, 著在方策, 乃命老臣, 俾之編集, 自顧缺爾, 不知所爲(中謝).

 

臣金富軾言

한국학 자료센터에 게시되어 있는 글은 앞에 나열된 김부식의 관직명 등이 모두 생략된 채 臣金富軾言으로 시작합니다. 자도 빠져 있습니다. 조선왕조에서 편찬한 고려사에도 정인지가 김부식처럼 관직을 먼저 나열하고 신 정인지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이라는 책이 있지만, 역적질을 고대사에만 한 것은 아닌 것도 같고 뭐 그렇습니다. 공부를 왜 하겠습니까? 논리적으로 추측하고 추론하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닌가요?

동국이상국집? 뭐 그런 문헌을 인용한 것은 좋지만, 이러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아마 이런 부분은 생략했을 것이다 라는 부언조차도 없습니다. 갑자기 중국에서 편찬했다는 숱한 관찬 사서나 경서 등에 서문이 어떻게 기술되어 있는지 궁금해 지네요.

 

臣金富軾伏言

제가 받은 파일에는 伏言이 아니라 으로 되어 있어서 글자의 순서를 바꾸었습니다.

 

(中謝)

임금에게 올리는 표문 중 경어를 생략하는 어떤 형식이라고 합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伏惟聖上陛下, 唐高之文思, 體夏禹之勤儉, 宵旰餘暇, 博覽前古以謂,

唐高 고려 정종 임금님의 이름이 堯라서 피휘한 것이라 합니다. 피휘 문제가 아니라면 唐堯로 씁니다.

宵旰는 宵衣旰食의 약자입니다. 임금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뜻이랍니다.

 

今之學士大夫, 其於五經諸子之書, 秦漢歷代之史, 或有淹通而詳說之者, 至於吾邦之事, 却茫然不知其始末, 甚可歎也. 況惟新羅氏高句氏百濟氏, 開基鼎峙, 能以禮通於中國, 故范曄漢書, 宋祁唐書, 皆有列傳而詳內略外, 不以具載, 又其古記文字蕪拙, 事迹闕亡. 是以, 君后之善惡, 臣下之忠邪, 邦業之安危, 人民之理亂, 皆不得發露, 以垂勸戒, 宜得三長之才, 克成一家之史, 貽之萬世, 炳若日星.

 

今之學士大夫~炳若日星 까지는 고려 17대 임금이셨던 인종 임금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고려는 고려의 임금을 황제라고 칭했습니다. 즉, 인종황제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자를 驢자로 써져 있던 것을 자로 고쳤답니다.

理亂의 理는 治라고 써야 할 것을 고려 성종 임금님 이름을 피휘한 것이라고 합니다. 피휘 문제가 아니라면 治亂으로 씁니다.

三長 재지(才智) 학문(學問) 식견(識見)

 

如臣者本匪長才, 又無奧識 洎至遲暮, 日益昏蒙, 讀書雖勤, 掩卷卽忘, 操筆無力, 臨紙難下. 臣之學術, 寒淺如此而前言往事, 幽昧如彼. 是故, 疲精竭力, 僅得成編, 訖無可觀, 祗自婢耳.

伏望聖上陛下, 諒狂簡之裁, 赦妄作之罪, 雖不足藏之名山, 庶無使墁之醬瓿. 區區妄意, 天日照臨.

雖不足藏之名山을 보고 고려시대에도 역사서를 명산에다 비장했다면 아직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거란의 침공때 모두 불탔다고 하는군요. 혹시나 그 사서들이 아직까지 보존되고 있기를 사실은 바랬습니다. 평소 역사 상식이 전무하다보니 그런 허황된 기대를 다 하게 되더군요.

 

한국학 자료센터에는 아래 부분이 없습니다. 아랫 부분은 인터넷에서 구한 파일에는 있었는데, 글을 맞추어 보면 아랫 부분이 포함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謹撰述, 本紀二十八卷, 年表三卷, 志九卷, 列傳十卷, 隨表以聞, 上塵天覽, 無任慙愧, 戰汗屛營之至. 臣金富軾, 誠惶誠恐, 頓首頓首, 謹上表.

 

본기가 28권이라고 적혀 있지요? 한편, 고려사는 본기가 없고 세가로 시작합니다. 본기가 있느냐 없느냐는 사서 편찬에서 의미가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왕조가 사대적이었다고 하지만 실리를 중시했기 때문이라 대외적인 표현방식이라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이는 서운관 춘추관 등에 우리의 고대사서를 많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 반증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