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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노예제 사회였을까?

참그놈 2021. 1. 29. 20:45

고조선 연구(같은 제목으로 윤내현, 리지린, 유 엠 부찐 세 분의 책이 단행본으로 나와 있습니다.) 3종 중에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나 리지린 교수의 고조선 연구나 공통으로 고조선 사회가 고도의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중국에서 기록한 동이전(東夷傳)을 기초로 그렇게 추정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조선이 정말 고도의 노예제 사회였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전문 학자도 아니고 역사서를 꾸준히 읽은 것도 아니어서 이런 주장을 하면 안되지만 고조선이 고도의 노예제 사회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어쩌겠습니까.

 

영화 Far and Away

탐 크루즈(Tom Cruise)와 니콜 키드먼(Nicole Kidman)이 함께 주연한 영화 중에 Far and Away(멀리 가? 멀리 떨어져? 사랑에는 국경도 풍습도 귀족도 천민도 다 필요없어?)가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 많은 이주민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하여 정착하게 됩니다. 아무 곳으로나 가서 깃발 꽂으면 자기 소유가 되었던 시기로 알고 있습니다.

 

환국을 말하면서 동서 5만리 남북 2만리를 말합니다. 그 강역이 요즘처럼 철책을 쌓거나 검문소 등을 설치하고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던 그런 국경으로 생각하십니까? 백두산 정계비의 예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다. 동위토문 서위압록 식으로 산줄기 또는 강줄기가 자연적인 경계(국경)가 된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처럼 인구도 수 십억에 이르는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그냥 여기저기 다니다 여기가 살만 하겠네! 싶으면 그냥 살면 되는 시대였으리라 추정하는 것이지요. 영화 Far and Away가 보여주고 있는 시대는 1000년 전도 아니고 2000년전 전도 아닌 불과 200여년 전 이야기입니다. 200여년 전에도 이 세상에는 살고 싶은 곳에 살 수 있는 땅이 많이 남아 있던 시기였는데 5000년, 6000년, 1만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런 땅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Far and Away는 환단고기나 고대 역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고대를 이해하기 위한 필요의 관점에서 저 나름으로는 반드시 봐 두어야 하는 영화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서울 명동에는 "엽서" 크기만한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요. 요즘은 엽서나 편지를 잘 쓰지 않으므로 엽서의 크기를 모르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가로 14~14.8cm, 세로 9~10.5cm 정도의 크기랍니다. 딱 손바닥 만하지요? 그림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유명 화가의 그림을 호당 100만원 하는 식으로 표시합니다. 어쨌거나, 그 엽서만한 땅덩이에 수 많은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켜 부동산 등기부 등본을 떼면 관련 기록이 A4 용지로 분량이 제법 되겠지요? 언제부터 부동산이 재산의 개념으로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고대에도 땅이 소유권 이전과 말소를 반복하는 그러한 재산이었을까요?

 

이덕일 님이 쓰신 책 중에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제목에 표시된 "지배"의 개념을 "거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현대와 같은 통치나 행정체제의 개념을 접합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물론, 사람이 모여 사는 형태이므로 영역에 대한 개념까지 전혀 없었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라는 책은 사기 조선열전을 해설한 것이나 진배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시다시피 사기 조선열전은 조한전쟁(고조선 VS 한나라)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서로 싸우는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에 지배라는 개념이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관점으로 표현하기 위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조한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고조선의 최종 말기에 일어난 일이므로 그 이전을 감안하면 독을 품고 살던 시기는 아니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책화제도

고조선 시대에는 "책화" 라는 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경계를 정하고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뭐 그런 것이었는데, 요즘처럼 철책치고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경계를 넘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노동력을 제공한다던지. 그런 관점에서 체벌의 개념으로 노예가 부분적으로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나, 기존 고조선 연구(윤내현, 리지린)의 추정처럼 대규모, 고강도 노예제 사회였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에도 고조선 사회가 고도의 노예제 사회는 아니었다는 추정을 할만한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 사회는 본관제도가 있어서 김해 김씨, 경주 최씨, 전주 이씨, 밀양 박씨 등등의 경우에서처럼 현대에도 그 근거지를 중시하는 것처럼 고대에도 씨족 중심으로 사회가 구성이 되어 있었다면 고강도 노예제라는 것이 납득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가 됩니다.

 

집성촌이라는 마을 형태가 있습니다. 한 마을에 특정 성씨가 많이 모여 사는 곳인데, 앞집에는 삼촌이 뒷집에는 8촌 형이, 옆집에는 사촌 동생이, 건넛집에는 7촌 아저씨가, 한 집 건너니 촌수로는 20촌 동생이, 큰길 건너 느티나무 아랫집에는 108촌 형님이... 누가 귀족이고 누가 노예일 것 같은가요? 20촌이나 108촌은 실정법 상으로는 남이지만, 매일 얼굴 맞대고 살거나 자주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웃대 5대조 할아버지에게서 나뉜, 12대조 할아버지에서 나뉜... 이러면서 족보 따지면 다 형이고 누나고 삼촌에 고모, 숙모 뭐 그렇지요?

 

만리장성, 고도 노예제 사회 성립의 단초.

부도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느 장(章)에 요(堯)가 수(數)를 몰랐다며 책망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숫자 5가 중심이니 뭐니 하면서 천도를 크게 어지럽혔으니 오미의 화 다음으로 이 세상에 큰 죄를 저지른 것이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요가 수를 몰랐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논어 위정편에 나오지요. 북극성 관련한 공자의 말입니다. 북극성이 자리를 잡으면 숱한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운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땅에다 붙박이 시킨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개뿔도 모르는 시키가 얼토당토 않은 개똥철학으로 천도(天道)를 저 편한대로 생각했다. 뭐 그런 내용이지요.

 

그러나, 초기에는 화하족의 세력이 약했고 후대로 가면서 점점 곳곳에다 성책을 쌓기 시작하더니 진시황에 이르러 만리장성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쩌면 역사는 만리장성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흉노(胸路 : 저 혼자 쓰는 흉노 한자표기입니다)가 만리장성에 부딪혀 흉노가 유럽으로 옮겨가면서 게르만 족이 이동하게 되고(가슴에다 길을 품고 갔겠지요? 그래서 胸路. 세계사 잘 몰라요 ㅡ,.ㅡ), 동양에서는 조한(朝漢)전쟁이 발발하기에 이릅니다. 만리장성을 쌓기 전에 만리장성 속에서 수 백년간 전쟁을 했지요? 7개 나라가. 그러면서 적지 않은 유민이 발생합니다. 조한 전쟁에도, 그 이후로도 계속 숱하게 치고박는 시대가 수 백년을 넘게 갑니다. 즉, 노예라서 노예가 아니라 전쟁통에 졸지에 족보에 기록하기 힘든 난데없는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하게 됩니다. 하필이면 이 무렵부터 중국은 동방에 대해서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부여는 귀족이 있고 노예가 있었다는 둥. 고구려는 앉아 놀고 먹는데 옥저는 소금도 바쳐 미인도 바쳤다면서... 즉, 고조선 연구에서 우리의 고대 사회를 고도의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다고 추정하는 시기는 전국시대라는 한 마디로 극심한 혼란기였다는 뜻입니다. 이미 언급했지만 고대 중국이 한민족(韓民族)에 관한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은 한나라 이후입니다.

 

저는 요나 순이 성군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수 천년 중국에서는 성군이라고 칭송하였고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는 요, 순, 주 문왕 또는 주 무왕을 삼왕(三王)이라고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소학, 사서, 삼경을 마르고 닳도록 외웠다고 하더군요. 요순에 관한 이야기는 부도지의 내용과는 완전히 상반된 내용인데, 부도지의 내용이 맞다고 한다면, 환웅천왕께서 신시를 여신 그 무렵부터 고열가 단군까지의 시기에는 조선쪽이 더 융성하였다가 만리장성을 완성할 무렵부터는 중국(China)쪽이 더 융성해지면서, 우리 전래의 풍습이나 역사는 점차 희미해지고 반대로 중국식 사고를 하게 된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즉, 고도의 노예제 경제방식은 중국에서 기원하는 것이지 우리 고대의 풍습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책화 부분에서 이야기했지만 부분적으로 노예제로 불릴만한 형벌상의 제도 같은 것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계급과 신분 구별이 철저한 중국과 달리 천제(天祭)를 모시면서 귀한 자나 평민이나 다 함께 어우러져 몇날 몇일을 함께 즐기고 놀던 나라에 사람을 가축처럼 취급하는 고도의 노예제 라는 벽이 존재했으리라 상상하기가 힘드네요. 중국의 역사서는 당시를 살던 중국인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므로 저희들 눈에는 중국식으로 노예를 많이 부린 사회로 보였을 수도 있지요. 리지린 교수의 경우 마르크스 엥겔스의 논리를 기반으로 설명하는데 서양에도 고도의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말재주도 없고 글재주도 없어서 뭐라고 하기 힘든데,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어 생략)


만리장성 완성을 전후로 고도의 혼란기가 지속되었다. 그에 따라 유민, 난민 등 소속이 불분명한 사람들도 증가하였다. 그들은 상황상 상당수가 하층민을 구성했을 가능성이 많다. 중국은 중국식 노예제 기반 경제 운용 방식이 있었고, 만주나 한반도에는 또 독자적인 경제 운용 방식이 있었다. 후자의 경우 해마다 천제(天祭)를 지냈고 천제를 지내는 동안에는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다 함께 어울려 함께 즐기고 놀았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귀한 자는 귀한자들끼리 비천한 자들은 비천한 자들끼리 마디마디(황제, 왕, 공후백자남, 삼공구경, 상대부, 중대부, 하대부, 상사, 중사, 하사, 등등) 구분지어 민중을 지배하면서 노예를 가축저럼 부렸다. 어느 때부터 중국이 동방의 풍속을 적기 시작했는데 자기들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들 이해 방식으로 기술하였다. 의도하지 않은 왜곡(?). 그러나, 조한전쟁 이후 중국(China)가 계속 융성하였으므로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우리의 제도나 풍습 역시 서서히 중국식으로 변해갔다. 그 결과로 조선이라는 국호에 주자학이라는 알멩이를 품은 나라가 되기에 이르렀다. 조선(고조선)에는 중국(China)과 같은 고도의 노예제가 없었는데 주자학의 나라에서는 노비가 중국식으로 고착화되어 버린 것이다.


고조선은 어떤 사회였을까?

 

고조선이 고도의 노예제 사회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보고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조선이 고도의 노예제 사회였을 것이라는 추정의 근거는 고대에는 생활방식이 빠르게 변하지 않았으므로 동이전에 기록된 부여나 고구려 등의 기록을 근거로 역으로 되짚어 추정하였으나, 제가 생각할 때, 하필 춘추전국이니 조한 전쟁, 5호 16국 등등의 혼란기가 길어지고, 하필, 그 혼란이 시작될 무렵부터 중국이 동방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오해가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효(孝)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에 대규모 노예라니 애초에 납득이 힘든 말이기도 합니다. 노비나 노예 역시 사람이므로 부모와 자식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힐강이라고 중국에 고사변 학파가 있다고 하는데(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고대 중국에 이름난 임금이 효자였다는 것이 후대에 추가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관구검이 고구려의 역사서를 많이 뺏아갔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전해지던 풍습을 중국이 도용했을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렇다면, 고조선이 어떤 사회였을지 뭔가 그림이라도 하나 보여야 될 듯 한데, 첫부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전문 역사학자도 아니고 역사서를 꾸준히 읽은 쪽도 아니어서 뭐라 표현하기는 어렵네요. 하지만 이미 적어 놓은 단락들에 제가 생각하는 고조선의 대강의 모습은 그린 것 같습니다.

 

고조선은 고도의 노예제 사회는 아니었다. (저 자신의 추정)

고조선이 고도의 노예제 사회로 오해되었다.

-> 열국시대(고조선 해체 이후 고조선의 거수국들이 각각 독립하였던 시대) 난리통에 늘어난 유민, 난민 등으로, 또 고대에 전쟁이 잦았으므로 군사적 목적으로 인구를 통제하기도 하였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도의 대규모 노예제가 있었기도 하였고, 근대적 또는 현대적 역사 연구 기법이 도입된 것이 얼마 되지 않으므로, 랑케가 1800년대 사람이지요?, 기록이 부실한 우리의 고대 모습을 서구적 관점으로 분석하고 재단하였다.

 

고조선은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지방분권적인 연방체에 가까웠다.(윤내현, 고조선 연구)

-> 우리 역사가 왜곡되고 뒤틀리게 된 근본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고조선을 살다가신 선조들은 원래 고상하던 분들이었는데, 내가 짱이야! 라면서 쪽수로 밀어붙이는 짱깨들을 결국 감당하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졌지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AD 2000년대가 되자,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은 대체로 지방자치를 실현하고 있으니까요.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생산력이 급격히 향상되고서야 생각할 수 있었던 지방자치를 무려 수 천년 전에 구현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조한전쟁 무렵에 군사력 차원에서는 중앙집권적인 체제에서 나오는 위력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조선이 이상사회였다는 국뽕을 들이키자는 것은 아닙니다. Far and Away의 예처럼 재산권? 뭐 그런 것이 복잡하고 첨예하지도 않았고, 빈부차이라고 해도 요즘처럼 요트나 별장, 전용 비행기 같은 것들도 없는 시대였으므로 요즘같이 빈부격차가 큰 사회였다고 생각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다만 8조금법 중에 죄를 지으면 돈이나 뭐 그런 것으로 갚는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는 요즘같은 실정법으로 작용한 것일 수도 있지만 주민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