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삼국사기를 원문으로 읽어보려고 용쓰고 있습니다. 제가 삼국사기를 원문으로 읽게 되는 날이 있을 줄 저 자신도 몰랐습니다. 물론, 한문에 익숙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이 이상하다는 비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원문으로 읽을 수 있다면 원문으로 읽어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자를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문 고전을 꾸준히 읽은 것도 아니면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삼국사기를 원문으로 읽으려 하면서 구입한 책은 명문당 판 삼국사기 입니다. 20여년 전에 나온 책이에요. 이병도 역주본도 있고 기타 새로 나온 역주본도 있었는데,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AD42년에 건국되었다는 가야가 3세기나 4세기에 건국되었다는 희안한 이야기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어떤 책이 정확한 번역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다만, 제가 살면서 명문당 한문 고전을 몇 번 구입을 한 적이 있는데, 다른 해설 없이 그저 한문 원문에 대한 해석만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오래 전에 출판된 책을 구입을 했었습니다. 다른 해설 없이 원문 해설만 되어 있는 책을 구한 것은 역사에 무지하므로, 누군가 휘양찬란한 언변으로 역주한 내용에 삼국사기 불신론 같은 것이 끼어있으면 구별해 낼 안목이 제겐 없거든요. ㅡ,.ㅡ
어쨌거나 삼국사기를 원문으로 읽으면서 알게 된 것들이라고 제목을 썼지만, 뭐 별 건 없습니다. 읽었다고 해야 그 깊은 뜻을 아는 것도 아니고 현재는 대충 훓어보는 상황이니까요.
1. 삼국시대에 유독 지진이나 홍수가 자주 났더군요.
신라본기만 읽었다면 이런 말을 못하겠는데 고구려본기도 어느 정도 읽었습니다. 고구려에도 지진이 났다는 기사가 종종 보이더군요. 옛날에 지진 계측기가 있었을까요? 즉 사람이 느꼈기 때문에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진이 적게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고구려 본기도 다 읽지 못했고 백제본기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백제는 신라랑 붙어있잖아요. 하긴 어찌된 것이 백제본기는 6권으로 신라본기 12권의 절반 뿐이긴 합니다.
2. 메뚜기 피해도 종종 일어났다.
사실 이건 의외였습니다. 메뚜기떼로 인한 피해가 신라지역에 종종 일어났다는 것이 지금도 이해가 잘 안됩니다.
3. 신라본기에서 왕이 자신을 고(孤)라고 했다가 과인(寡人)이라고 했다가 짐(朕)이라고 하는 등 호칭이 일관되지 않다.
이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인지, 아니면 이미 유학(儒學)의 전통에 따라 뭔가 다르게 구별을 해서 적은 것인지 애매합니다.
4. 한문으로 된 역사서, 특히 기전체는 열전이나 표, 서, 등을 충실히 알아야 본기를 읽을 때 한문 단문으로 적힌 기사들이 소설을 읽는 것처럼 맥락을 알게 된다.
기전체던 편년체던 역사를 기록했다면서 문장 길이가 매우 짧습니다. 00년 춘정월, 00삭, 0000000. 이런 식으로 문장들이 짧습니다. 삼국사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춘추도 그렇게 적혀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춘추보다 춘추좌씨전이 더 알려진 것인지도 모르지요. 춘추는 편년체임에도 좌씨전이나 곡량전 공양전이 없으면 읽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어쨌거나 삼국사기 원문을 보면서 날씨가 가물었다면서 旱(가물 한) 한글자만 적어놓은 것을 보고서는 생뚱맞다는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고대의 산업은 농업이 중심이었을텐데, 고대에 경운기나 트랙터 같은 기계가 있었을 리는 없고, 모두들 사람의 손으로 농사를 지었을텐데 그 주변 내용을 적혀 기록하지 않고 旱 한 글자만 적어 놓은 것입니다. 저 자신이 삼국사기가 편찬된 시기에라도 살면서 그 내용을 읽었다면 삼국시대로부터 몇 백년 후이긴 하지만 신라시대나 삼국시대나 농경 기술에 차이가 별로 없다고 가정하면 보다 실감나게 이해를 할 수 있었겠지만, 요즘 세상에 누가 호미 들고 밭 메고, 소 등에 쟁기 메달아 논밭을 가나요. 한 해가 가물면 그 해 한 해는 굶주리는 사람이 늘 수 밖에 얺는데, 그런 관점에서 사관들의 시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싶은 생각도 들고 뭐 그랬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외가에 있으면서 어른들이 밭메는 모습을 본 적이라도 있습니다. 저더러 그거 하라면 대강 눈치보고 어디 도망을 갔을 거에요. ㅡ,.ㅡ 그 때가 1970년대 중반인데, 그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경운기도 귀하던 시절입니다. 외할머니께서 호미 한 자루 들고 밭고랑 잡초를 뽑으시더라고요. 그 길이가 아마 80m 정도는 될 겁니다. 주소 대라고 하면 그 주소 댈 수 있습니다. 한 고랑이 80m 인데 그 밭이 넓이가 최소 30m는 또 됐어요. 그럼 고랑이 몇 개개요? 그런 밭이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쪼그리고 앉아서 오리걸음 해가며 하루 종일 잡초를 뽑는 것입니다.
하긴 가물면 가뭄으로 심어놓은 작물도 자라지 못하지만 잡초도 자라지 못하니 노동량은 줄어들 것이지만, 문제는 가뭄이 들어서 수확을 하지 못하면 가을부터 굶어야 한다는 것이 또 문제지요. 여름에 굶는 것과 겨울에 굶는 것은 질적으로 다를 것입니다. 여름에야 뽑아먹을 풀이라도 있고 냇가에 개구리, 미꾸라지, 송사리 등등 그나마 먹을 것이 보이는데 겨울에는 그렇지 않아요. 풍년이 들어도 다음해 감꽃이 필 무렵이면 보릿고개가 찾아왔던 것이 1960년대까지 이어졌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 표시하는 년대는 지금보다 최소 천 몇 백년 전이고 길게는 2000여년 전이에요. 그 당시 통일벼 있었게요? 통일벼 없었답니다. 통일벼와 전통벼의 차이를 혹시 아세요? 비닐하우스도 없었고... 그럼에도 그런 기근이 나고 그러면 창고를 풀어서 진휼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렇더라고요.
5. 고대에 곡식을 저장하는 별도의 방법이 있었는가...
이 이야기는 위 이야기의 연장인데, 원문을 읽다가 기근에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6개월 간 나라에서 식량 공급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실 맹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라는 9년 먹을 것을 저장해야 된다?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가물가물하네요. ㅡ,.ㅡ
옛날에 냉장고가 있었나요? 곡식이라는 것이 수분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요즘처럼 냉장 설비가 충분하지 않던 고대에 어떤 방법으로 저장을 했을까? 그리고 최대 몇 년간 저장할 수 있었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동빙고 서빙고 하면서 여름에도 임금님이 얼음을 하사했다 뭐 그런 이야기는 있지만, 삼국시대에 동빙고나 서빙고가 있었을까요? 사실 맹자가 9년 먹을 것을 저장해야 한다? ㅡ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 뭐 그런 내용을 썼지만 도무지 고대에는 어떤 저장 방법이 있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었습니다.
식민사학이니 뭐니 하면서 역사비판을 하면서 주로 강역 문제나 뭐 그런 것을 언급하지요. 뭐 저도 그런 내용을 알게 되면서 삼국사기를 원문으로 읽어 보려 용쓰는 중인데, 뜻하지 않게 고대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그런 의문도 덩달아 생기네요. 그래서 몇 자 끄적였습니다. 요즘 자라는 아이들에게 호미 하나 쥐어주고 밭메라! 그러면 "이건 미친 짓이야!"라며 인권으로부터 시작해서... 생략 ㅡ,.ㅡ
요즘 자라는 아이들이 워낙 총명하고 똑똑하잖아요. 뭐 자라는 아이들에게 일부러 그런 걸 시키자는 것도 아닙니다. 저더러 하래도 할 자신 없어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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