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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수와 당과의 전쟁에서 패한 원인

참그놈 2021. 10. 10. 18:39

고수전쟁을 아시지요? 고구려와 오대십국을 통일한 수나라와의 전쟁입니다. 수문제 수양제를 이어 4차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했고 2차 침공에는 무려 113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몰고 옵니다. 그러나 을지문덕 장군이 계셔서 2차 고수전쟁에서도 고구려가 이깁니다. 그러나,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면서 역시 당태종 이세민이 쳐들어 옵니다. 30만 대군을 이끌고.. 역시 안시성 싸움에서 양만춘 장군 들의 활약으로 막아내기도 하고 연개소문이 활약하여 쫒아내기는 하지만 신라가 당과 연합한 까닭으로 고구려는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요즘 삼국사기를 한문 원문으로 읽어보려 애를 쓰고 있는데, 읽다가 검색하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할 것 없이 지진이나 홍수가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당시가 소빙하기였다고 하더군요. 즉, 지진이나, 홍수, 기근 등이 자주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고구려는 강성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백제나 신라를 병합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중국은 진나라가 들어서면서 지방자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혁파하고 군현제를 도입하는 철저한 중앙집권적인 통치형태로 전환합니다. 그러나 몇 십년 못가서 또 다시 초나라와 한나라가 패권을 다투게 되고 한나라가 성립하게 되는데 한나라 역시 군현제를 보강하여 군국제를 도입합니다. 진나라와 달리 호족이나 세력가들 때문에 약간의 여유를 허용했다고 할까요?

 

앞에서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를 병합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완전한 지방자치제라기 보다는 고조선이 삼조선으로 운영된 것처럼 규모가 다르긴 하지만 분권적인 통치형태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정치형태와 소빙하기라는 자연적인 조건이 결합했을때, 중앙집권적인 수나라나 당나라가 보급물자의 확보라는 관점에서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수 문제가 30만, 113만 이라는 대병을 이끌고 옵니다. 중앙집권적인 행정체계를 갖추었으므로 식량이나 각종 군수물자를 거둬들이기 용이했을 것입니다. 중국이나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도 소빙하기를 겪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지만 중국은 중앙집권적인 정치형태였으므로 전쟁물자의 보급이라는 차원에서 자연적인 제한을 벗어나는데 있어서 우위를 가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이지만 소빙하기 라는 자연조건이 아니었다면, 즉, 농업생산 등이 타격을 받지 않았다면 아무리 고구려나 백제 신라 등이 각각 분리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중국이 쪽수로 밀고 들어온다고 해도 방어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요즘은 어느 나라에 식량이 부족하면 무역을 통해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거나 하지만 옛날에는 그런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요즘은 쌀이나 콩 같은 곡물이 아니라도 소나 닭, 돼지, 양 등 다양한 먹을거리가 있지만 옛날에는 주로 곡식만을 주로 먹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유목민들이야 풀은 짐승들이나 먹는 것이라며 고기를 먹었겠지만, 유목민들의 인구보다 농사지어 먹고 사는 인구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거든요. 요즘 처럼 세계 식량기구 같은 것이 있었을리도 만무하고...

 

 

맨날 우리나라 삼국시대를 이야기 하면서 화랑 관창이나 김유신, 미실, 비담, 계백,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연개소문 뭐 그런 인물들만 들었는데 실제 삼국사기를 읽어보니 기근이 든 해가 한해 두해가 아니고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였다는 내용이 한번 두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백제본기의 경우 기근이 심하게 나서 고구려로 도망한 사람들도 있고 신라로 도망간 사람들도 있다는 내용도 있더군요. 어쩌면 삼국시대가 한민족(韓民族) 역사에서는 가장 큰 위기를 맞았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소빙하기라는 자연적인 악조건과 지방분권이라는 통치형태였으므로 거대 인구를 병사로 활용할 수 있고 식량이나 군수물품 조달도 중앙집권적인 당시의 중국이 보다 유리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당시에는 농업이 핵심 산업이던 때입니다. 소빙하기라는 자연조건을 만나면 치명적이지요. 요즘처럼 장기 보관 기술이나 설비 또한 없었을 것이고... 물론 수나라는 거대 병력을 동원한 여파로 몇 십년 후에 당나라가 서게 되는 빌미가 되기는 했지요. 그런 면에서 당태종이 인물은 인물인 것 같습니다. 정관의 치라는 말이 중국 역사에 남았고 개원의 치라는 이름도 그 후손에게서 났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