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에 관한 내용 중에서 주(周)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그러나 신하는 아니었다는 기록이 상서대전 어디에 주석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원문이 아니고요. 원문과 주(注)는 다른 것인데 주(注)는 나중에라도 달 수 있습니다. 주나라로부터 한나라까지 1000년 정도가 지난 시기인데, 중국 한(漢) 나라 이전의 어느 기록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내용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1000여년이 지난 후에 주(注)를 추가하면서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내용이 덧붙여졌는데 주 무왕이 기자를 봉한 것이 맞을까요?
환단고기나 우리나라 입장에서 쓰여진 여러 책에서는 기자를 봉한 주체가 주(周) 무왕이 아니라 고조선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조한전쟁에서 조선이 패합니다. 군사적으로 패한 것이 아니라 내분에 의해 패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패한 것은 사실이고 그 이후로 중국은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고조선 강역이었던 곳을 중국이 장악하게 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에 기자 시절의 중국 임금이 주 무왕이었으므로 주 무왕이 기자를 봉한 것처럼 주(注)를 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중국 한나라 이후로 중국 내부에서도 적지 않게 왕조가 교체되기는 하였지만 어쨌거나 한나라 이후로는 중국의 영역이 거의 유지가 되었으므로 역사를 왜곡한 것이지요.
기자조선에 관한 기록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기자를 봉했다는 곳이 낙랑군이라고 하면서 실제 기자묘는 북경 보다 아래지역에서 발굴되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초기에 기자가 이동해 간 곳은 현재의 중국 동부지역인 하북성 어디였는데, 어쨌거나 기가자 고조선 강역에서 봉지를 받고 살았으므로 한 무제와의 조한 전쟁이 나기까지 1000여년이 지났으므로 그 기간동안 조선과 동화되었다고 가정할 때, 이후 발발하는 조한 전쟁이나 기타 옛날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기자의 후손이 북경 근처까지로 쫓겨간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봅니다.
'글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이덕일 역사TV) (0) | 2021.11.12 |
---|---|
고지도와 문헌으로 확인하는 낙랑군 (0) | 2021.11.08 |
조선시대의 수서령은 사상통제, 종교탄압이었을까? (0) | 2021.11.08 |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 만주족 (0) | 2021.11.07 |
가야 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재 토론회 (0) | 2021.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