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원문 기이 1권 : 오가야 부분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三國史 :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BC57년에 건국되었다고 하고, 가야는 AD42년에 건국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왕검조선으로 시작하여 위만조선 등 시간적 순서대로 적고 있는 것 같은데, 오가야(五加耶)가 먼저 나오는 것은 의외입니다. 북부여나 동부여보다도 먼저 나옵니다. 다음에 나오는 북부여는 BC59년이라고 나오거든요. 그렇다고 한다면 오가야(五加耶)가 먼저 건국되어 있었다는 뜻일까요?
紀異 第一 五加耶
按駕洛記賛云, 垂一紫纓, 下六圎卵, 五歸各邑, 一在兹城, 則一爲首露王, 餘五各爲五伽耶之主, 金官不入五數當矣, 而本朝史畧, 並數金官, 而濫記昌寕誤.
阿羅(耶也)伽耶(今咸安), 古寧伽耶(今咸寧), 大伽耶(今高靈), 星山伽耶(今京山, 一云碧珍), 小伽耶(今固城). 又本朝史略云, 太祖天福五年庚子, 改五加耶名, 一 (爲金海府), 二高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寧恐高靈之訛), 餘二阿羅, 星山(同前, 星山, 或作碧珍伽耶).
하필 우리 고대사에 관한 역사들이 거의 전하지 않는데, 북부여나 신라 이전에 오가야(五加耶)가 먼저 있었다면, 왜 김부식의 삼국사(三國史)는 신라의 건국시기를 가장 앞선 것으로 기록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네요. 그 외에도 가야나 신라는 언어나 풍속이 아주 비슷했다고 합니다. 또 무덤 양식을 연구하는 분들도 가야가 먼저다! 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역사를 모르지만, 동이(東夷)라 불리던 삼한 한민족의 고대 전체 판도가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현재의 중국 동부 연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때(대륙삼국설), 조한전쟁(고조선 VS 중국 한漢나라)이 발발한 이후, 삼한의 판도에서 마한이나 북부여 동부여는 북방판도이고 가야는 남방의 판도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주(周)나라 무왕이 한 번 기치를 들자 800제후가 동참했다
고 했습니다. 삼국지 동이전이나 진서 등에 78개 소국을 언급했다고 하는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모두 자그막 자그막 하던 때입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여 중앙집권적 체제를 최초로 성립시켰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한(漢)나라가 들어서지만, 고조선 거수국들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조한전쟁에서 위만조선이 중국 한(漢)나라에 밀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무제와의 전쟁으로 고조선의 여러 거수국들이 약세가 되기도 하고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그 사건을 전후하여 진(秦) 나라 유민들도 동쪽으로 이동을 했다고 하고, 조한전쟁의 여파 등으로 바야흐로 고조선 거수국들 사이에서도 본격적인 중앙집권화 현상이 발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신라본기에서 혁거세 19년에 진한이 나라를 들어 신라에 항복하였다는 기사에서 보듯 삼한 내부에서도 뭔가 급격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백제본기에 마한 왕에게 거주할 땅을 지정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신라본기 19년조에 호공이 마한 왕에게 조공 문제로 따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신라본기에 고조선 유민이 6촌을 구성하고 있었다고 하는 등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신라의 초기 6부도 마한 왕의 허락을 받아 진한에 자리를 잡은 고조선의 백성이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김부식이 신라 출신이라 그런지 그 내용은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 전후 사정을 따져 보면 고조선의 강역 중 한반도 남단에는 가야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어느 날 진시황의 통일 전쟁이나 조한 전쟁 등의 여파를 피해 동쪽으로 이주해 온 고조선 유민을 마한 왕이 진한 어느 지역에 살게 해 준 것이었는데, 진한 지역에 자리잡은 고조선의 유민들은 이미 전쟁통을 겪고 피해 온 것이라 정세변동을 알고 있었으므로 국세를 확장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왕정체제를 신라가 먼저 성립시켰다는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 봅니다.
가야에 관한 내용 중 구지가(龜旨歌)에 대한 내용을 보면 9촌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알은 6개만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3 마을은 혹시 고조선의 유민들인 신라 6부가 자리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앞서 신라를 구성한 고조선 유민들은 전쟁을 이미 겪고 이주해 왔으므로 세력 확장을 먼저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다른 나라들보다 중앙집권화를 먼저 시작하고 이룬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그래서 건국시기를 혁거세를 먼저 쓰고 가야는 체제 변화를 완성한 것이 AD42년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편, 가야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가운데, 그나마 기록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것은 김부식의 삼국사(三國史),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이라고 합니다. 하필 우리에게 남은 기록이 너무 적어서인지 일본이 임나일본부라는 말로 역사 침략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뭐 그런 상황인데, 일본이 조선총독부를 앞세워 역사왜곡을 시작할 무렵 임나가 가야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일본 왕이 자신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가야에서 백제까지는 일본과 무관하지 않다는 뜻일텐데, 문제는 일본이 뜯어고친 역사를 그들이 이실직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1962년인가? 북한에서 김석형 이라는 분이 삼한삼국 일본열도 분국설 을 주장합니다. 일본의 고대사는 죠몬시대와 야요이 시대로 크게 나뉘는데, 죠몬시대가 아주 깁니다. 총균쇠를 읽어 보셨다면 그에 관한 내용을 알 수 있는데, 종균쇠가 13000여년의 역사를 말하는데 그 중 11000년 정도가 일본의 죠몬시대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다 야요이 시대로 접어들면서 급격히 발전하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갑작스런 변화는 삼한 삼국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이 없다면 성립되지 못할 것입니다.
일본서기 앞부분을 조금 읽어 본 적이 있는데, 일서운(一書云)이라고 적힌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AD 700년 경에 일본에도 문자가 있기는 했지만 기록이 일관되지 못하고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기록들을 모으고 모아서 일본서기(日本書紀)나 고사기(古事記)를 만들었다고 추측하는데, 하필 그 시기가 백제가 멸망하여 대규모 이주가 있었다는 사실과 부합합니다. 통합전쟁이 활발해 지는 시기이기도 하지요. 그런 까닭으로 저는 일본서기를 백제의 통한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현재도 일본에는 고구려계 가야계 등의 지명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백제 멸망 후 이주해 간 백제 세력이 본격적으로 통합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일본은 소규모 국가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었지 않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전쟁이 격하지 않은 살기 좋은 상태였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해당 내용은 총균쇠에 나옵니다. 기나긴 죠몬시대 내내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고 문자도 없었지만 해산물이 풍부하고 기타 여러 가지 먹을 것이 풍부하여 먹고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시아 역사가 뒤엉키기 시작한 것은 조한전쟁으로부터인데, 그리하여 어느 때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는 바람에 고구려와 백제가 망하면서 일본도 격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요. 그런데, 먼 훗날 그 화풀이는 조선에다 했다고 할까?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다 화풀이 한다지 않습니까. 모르긴 합니다. 일본이 2차 대전에 원폭을 두드려 맞지 않았다면 중국까지 점령을 했을지...
총균쇠를 읽어 보시면, 원시 부족들 간에도 전쟁을 치른 지역도 있지만 낯선 사람에게 호의를 베푼 원주민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낯선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음에도 그들 백인들은 침략자인 경우가 많아서 나중에 다 정복된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하여 얄리는 왜 우리 흑인들은 화물(Cargo)를 만들지 못한 것이냐?며 다이아몬드 박사에게 묻기도 하지요. 일본도 어쩌면 죠몬시대에는 기술이나 문명에서 후진적이었을 지는 모르나 전쟁이나 뭐 그런 험한꼴을 모르고 살았던 평화로운 원주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럼 백제가 졸지에 나쁜 놈이 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백제는 또 당나라에게 깨졌잖아요. 결국 밥그릇 싸움이었을까요?
중국(中國)이라는 나가 있는데, 동으로 만주, 북으로 몽골, 서쪽으로 신장 위구르와 티벳, 그리고 남쪽으로 해남도까지 해서 매우 큰 영토를 확보(?)하고 있지만, 사실 중국(中國)은 낙양 근처의 어느 평야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한반도 보다 넓은 평야지역이 낙양 근처 어느 곳에 있다네요. 황하 물줄기를 따라 떠내려 오는 황토흙으로 형성된... 그곳을 서로 차지하려고 그랬는지 어느 때부터 맨날 치고박고 싸운 것이 중국의 역사라고 해야 할까요? 그 와중에 평화롭게 살았던 삼한에게 불똥이 튄 것이 아닐까? 싶네요.
물론, 삼한도 마냥 평화롭게 살았다고 국뽕 가득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1980년대 말인가 1990년대 초인가? 일본에서 할복을 하니 마니 하면서 뉴스가 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문화가 가야나 백제에서 건너간 것이라면... 우리 선조들이 살벌한 사람들이었다는 말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북부여나 동부여 백제 신라보다 오가야를 먼저 기록했다는 것이 의외로까지 생각됩니다. 이 포스트의 내용은 평범한 서민이 이런저런 책이나 역사 관련 영상 등을 보면서 혼자 그린 뇌피셜입니다. 문헌적 근거니 뭐니 그런 거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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