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원문/논어

논어 읽기 20 : 세주완역 논어집주대전 P.52

참그놈 2022. 6. 23. 03:14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교묘한 말과 좋은 안색을 하는 자는 인이 드물다는 뜻의 문장인데, 논어를 처음 읽은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문장이 학이편에 유자왈 다음에 위치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한자도 한문도 사서나 오경이 있다는 것만 들어봤던 시절이고 처음 읽어 보는 입장이기는 했어도 공자의 어록을 아무 순서나 체계없이 늘어놓았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앞 문장과 뒷문장의 상관관계라고 해야 할지 뭐 그런 것이 안느껴졌었습니다. 지금 세주완역 논어집주대전을 읽고 있는데, 이제서야 이 문장이 왜 여기에 위치해 있는지 조금 감이라도 잡히네요. 유학에서 말하는 학이시습지(學習) 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랐으니 그랬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주완역 논어집주대전을 번역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마음에 안드는 부분도 있지만... 가령 인(人)을 남으로 해석한 것 같은... 그러나 그 문제는 세주완역 논어집주대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한문고전 번역서가 그렇게 번역하고 있는 사례를 보았으므로 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集註 : 巧好, 令善也. 好其言, 善其色, 致飾於外務, 以悅人, 則人欲肆, 而本心之德, 亡矣.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기쁨은 설(說)이고 교언영색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열(悅)이라는 것. 뭣도 모르지만 저는 두 가지를 구분해서 썼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언영색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지만, 배우고 때때로 익힌 기쁨은 설(說)이라서 논어도 지어지고 논어집주대전이나, 공자가어, 주자어류 같은 책이 지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쁘다는 글자에 말씀(言)이 들었잖아요.

 

新安陳氏曰, 此章仁字, 以心之德言, 乃專言之, 仁也.

集註 : 聖人辭不迫切, 專言鮮則絶無, 可知. 學者所當深戒也.

성인의 언사는 박절하지 않아서 선(鮮)자를 썼지만 실제로는 인(仁)이 전혀 없다는 뜻이랍니다. 글쎄요. 사람이 모두 인의예지의 성을 부여받는다고하는데 평생 그렇게 살면서 인(仁)이 없는 채(?)로 사는 사람도 있다는 말일까요? 인(仁)이 없는 채에 물음표를 붙인 것은 사람이 날 때부터 인의예지의 성을 부여받는다고 유학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철부지 라는 뭐 그런 뜻은 아닐까요?

 

조선시대 어느 선비가 40이 넘어서 공부를 시작해 과거에 급제한 분이 있다고 합니다. 실컷 놀았으니 공부나 할란다 하면서... 과거에 입격할 때까지 오른손을 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 외에도 철없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뭔가를 느껴 삶의 방식이 바뀐 분들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신안진씨의 설에 인(仁)이 심지덕을 전체로 말한 것이라는 설에서 인의예지의 성을 모든 사람 각각이 부여받는 것이라면 절무(絶無)라고 해서 딱 잘라 말하기 보다 어떤 여지는 있어야 한다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물론 딱 잘라야 할 때는 또 딱 잘라야 하겠지만... 참 해석이 묘하네요.

 

朱子曰, 巧言亦不專爲譽人過實. 凡辭色間, 務爲華藻, 以悅人視聽者皆是.

교언이라는 것이 꼭 칭찬하는 그런 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옛날을 안 살아봐서 모르겠지만 해당 내용을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서 생각하면 옛날에는 귀족들이나 글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대학장구 서문에는 골목마다 학교가 없는 곳이 없었다는 내용이 있기도 하지만, 하은주 3대에는 종이도 없던 시절인데 죽간을 그 만큼 많이 생산을 했을까요?

 

현대를 기준으로 하면 교언영색 선의인이라는 문장이나 위의 주석이 보다 적절한 주석일 수 있지만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 어려우니 이해가 좀 어려운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가령, 조선시대를 다룬 역사드라마에서 성균관 유생들이 서로 어울려서 글을 읽고 그러지만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하인들이 수두룩한 집안의 자제들입니다. 중국이라고 달랐겠습니까. 그런데 교언영색 하는 이들이 있었다? 많았다?

 

요즘의 교언영색이라면 집값이 계속 오른다거나 누구누구가 돈 벌었다라거나 하는 그런 말일텐데, 옛날에는 또 어떤 말들이 교언영색에 해당하는 말들이었을까요? 본문에는 以悅人視聽者皆是 다른사람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려는 것이 모두 교언영색이다 라고 하기는 하는데...

 

○只爭一箇爲己爲人. 若動容貌正顔色. 是合當如此, 亦何害. 但做這樣務, 以悅人, 則不可.

위기(爲己)냐 위인(爲人)이냐가 논쟁이라는데, 증자가 하루 세 가지를 반성한다고 했습니다. 위인모이불충호(한자생략) 가 그 중에 하나인데, 그러고 보면 논어 뿐만 아니라 한문 고전 중 인(人)자가 뜻이 참 묘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단순히 남이라고 이해를 하려니 옛날에 논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교우관계에 있는 사람이라 여기려니 여붕우교(한자생략) 이라는 구가 있고, 그러다면 자신보다 지위상 위에 있는 사람일까요? 신분제 사회에서 태어나면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있고 자기보다 낮은 사람도 자연적으로 있게 마련인데, 인(人)은 어떤 사람을 뜻한 것일까요?

 

○只是心在時, 便是仁. 若巧言令色, 一向逐外, 則心便不在, 安得謂之仁.

○巧言令色, 求以, 則失其本, 心之德矣. 不待利己害人, 然後爲不仁也.

여기서는 기쁘다는 뜻으로 설(說)자를 썼네요. 그리고는 자기에게는 이익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되고 나서 불인(不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렇아면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것이 심지덕과 함께 자기의 내부에 있는 것이라는 뜻일까요?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뻑도 교언영색이다? 그리하여 내가 이러이러하여 기쁘므로 여러분도 기쁠 것이다 또는 기뻐하라? 그렇다면 위 두 주석의 순서가 바뀌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교언영색으로 바깥을 쫓는다는 내용이 있으니...

 

人有此心, 以其有是德也. 此心不在, 便不是仁. 巧言令色, 此雖未是大段姦惡底人, 然心已務外, 只求人悅, 便到惡處, 亦不難.

이 주석은 교언영색 선의인에 붙은 것인지 아니면 주자의 학자가 심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는 부분에 붙은 것인지 애매한데, 내용상 아마도 주자의 집주에 붙은 주석으로 생각됩니다. 교언영색으로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바로 덕이라고 하네요.

 

교언영색이 대다히 간악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결국은 악에 이르게 된다는 설명이네요.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겠지요?

 

○容貌辭氣之間, 正學者持養用力之地. 然有意於巧令, 以說人之觀聽, 則心馳於外, 而鮮仁矣. 若是就此持養, 發禁躁妄, 動必溫恭. 只要體當自家直內方外之實事, 乃是爲己之切, 求仁之要, 復何病乎. 又曰, 小人訐以爲直, 色厲內荏, 則雖與巧言令色者不同, 然考其矯情飾僞之心, 實巧言令色之尤者. 故聖人惡之.

소인은 말을 앞뒤 가리지 않고 하는 것이 곧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런 모습이 강해 보이나 속은 무르다고 하네요. 그런 모습이 교언영색과는 다르지만 실제로는 그 보다 더 나쁜 것이랍니다. 그래서 성인이 싫어했다네요. 성인을 공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런 일화는 어디에 있을까요? 논어를 계속 읽다보면 나올까요?

 

○問, 脩省言辭, 誠所以立也, 修飾言辭, 僞所以增也. 發源處甚不同. 夫子所謂巧令鮮仁, 推原而察, 巧令之病所從來, 正是, 有所爲而然, 如未同, 而言以言餂人, 脅肩諂笑, 以喜隨人之類, 皆有所爲也. , 有所爲之說, 甚善.

소위(所爲) 라는 말을 "의도가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말은 동의하는 것처럼 하고 어깨를 으쓱하거나 하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히히덕거린다는데, 저 자신도 그러면서 살아온 것 같기는 하네요. 옛날 사람들은 어떤 일로 히히덕거렸을까요. ㅡ,.ㅡ

 

集註 : 程子曰, 知巧言令色之非仁, 則知仁矣.

, 夫子言鮮仁, 程子直言非仁, 何也. 朱子曰, 夫子之言辭, 不迫切, 而意已獨至者也. 程子懼讀者之不察, 於巧令之中, 求少許之仁. 是以直斷以不仁, 以解害辭之惑也.

교언영색이 비인(非仁) 이라는 것을 알면 그것이 바로 인(仁)을 아는 것이랍니다. 공자가 부드럽게 말한 것과 달리 정자는 단호하게 말한 까닭을 묻는데, 문자적 의미에 치우쳐 교언영색 중에서도 인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그런 혹 하는 심경을 경계한 것이라고 합니다. 

 

○聖門之學, 以求仁爲要, 語其所以爲之者, 必以孝弟爲先. 論其所以賊之者, 必以巧言令色爲甚. 記語者所以引二者, 於首章之次, 而其序如此, 欲學者知仁之急, 而識其所以當務與其所可戒也.

효제와 교언영색 둘을 차례로 내세워 배우는 이들이 어디에 주의를 쏟아야 하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제시했다고 합니다. 인지초 성본선 성상근 습상원(한자 생략) 이라는 말이 있던데, 버릇이나 습관을 어떻게 들이느냐를 강조한 듯합니다.

 

○勉齋黃氏曰, 苟知心馳於外務, 以悅人者之非仁, 則反而求之, 心存於內, 而無私當理者, 卽仁也.

오래 전 "백두산족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봤더니 "나에게서 구하라"는 말씀이 있더군요. 같은 내용으로 보이네요. 사사로운 이해관계가 없어야 인(仁)이라고 합니다.

 

○雲峯胡氏曰, 上章好犯上作亂, 是剛惡, 此是柔惡, 聖賢深惡焉.

범상작란은 큰 악이고 교언영색은 부드러운 악(?)이랍니다. 성현들은 몹시 싫어했다는데, 柔惡이라고 한 것이 아마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 아닐까?싶습니다. 

 

○東陽許氏曰, 此章大意, 似聖人觀人, 然未嘗不警省學者, 觀其辭甚嚴. 蓋警省學者之意爲多.

성인이 사람을 보는 관점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배우는 이들이 경계하고 살피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내용이랍니다. 교언영색 선의인 장(章)의 주석들 중에서 다른 주석들보다 좀 더 주의가 쏠리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췌 무지하게 살아와서리... ㅡ,.ㅡ

 

知巧言令色之非仁, 只就此句飜轉看, 則知直言正色之爲仁. 然此只就言色上論, 盖仁是心之德. 延平先生(이통), 所謂當理而無私心者也. 凡欲動於中, 則心私矣. 其接於事, 不當於理者, 皆非仁也. 夫致飾於外, 不當理也. 務以悅人, 皆私心也. 推此類而言之, 則非禮之視聽言動心私違理, 皆非仁. 本註, 人欲肆而本心之德亡. 雖就言色上言, 而所包者甚廣. 又恐學者止於言色上致察. 故著程子之說, 於圈外使人隨事致察, 而立心以公也. 

 

교언영색을 바꿔 말하면 직언정색이라고 합니다.

연평선생 선명이 "이통"인가 본데 따로 검색해 보지 않았습니다.

비록 말씨와 안색을 두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을 포괄하는 내용이므로 배우는 이들이 말씨나 안색만 살피는 것에서 그칠까 걱정했답니다.

 

圈는 동그라미 라는 뜻이라는데, 옛날 책에 보면 동그라미 표시가 된 문장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첨부되는 부호인지 몰라서 제가 받은 파일에서는 일부를 지우기도 하고 뭐 그랬는데, 어쨌거나 특별히 동그라미 뒤에 정자의 설을 배치하여 일에 따라 어떤 사람의 행실을 잘 살펴서 마음을 공정하게 세우기를 바랬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