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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대 유리왕의 황조가, 개인적 갈등과 좌절?

참그놈 2019. 12. 17. 01:02

오늘 황조가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때 국어시간에 배운 것 같은데 뜬금없이 생각이 나길래 검색을 했습니다. 아래는 원문과 음 그리고 해석입니다.


翩翩黃鳥    편편황조 : 펄펄나는 저 꾀꼬리
雌雄相依    자웅상의 : 암수 서로 정답구나
念我之獨    염아지독 : 외로워라 이내몸은
誰其與歸    수기여귀 : 뉘와 함께 돌아갈꼬.

 

황조가의 해설을 읽다가 좀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어서 포스팅 합니다. 제가 읽은 황조가 해설은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24XXXXX80606

 

황조가

翩(편) : 가볍게 날다. 오락가락하다 黃(황) : 누른빛 鳥(조) : 새 雌(자) : 암컷 雄(웅) : 수컷 相(상) : 서로 依(의) : 의지하다 念(념) : 생각 我(아) :

100.daum.net

 

해설에도 나와 있지만 황조가는 삼국사기 권 13 고구려 본기에 나오고 그 배경설화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배경설화를 설명하면서 서정시로 보는 학자들도 있고 서사시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고 하는데, 마지막 부분에 가면 수능이나 기타 여러 시험 때문인지 서정시로 고정시켜서 답을 정해놓고 있다는 겁니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왕이라고 개인적인 감정이 없을리야 있겠습니까만 왕이 어디 개인입니까. 검사 한 사람 한 사람조차도 각각을 기관이라고 하는데, 더군다나 고대의 왕이 남긴 시가를 왕으로서의 직위 같은 것을 배제한 인간 개인으로서의 정서를 표한 서정시이다? 그 보다는 오히려 농경족과 수렵족을 중재하지 못한 제왕의 탄식이라는 서사시적 해설이 더욱 공감이 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역사를 잘 모르지만 아시다시피 고구려는 건국초기부터 수 백년간 중국(China)의 한(漢)과 싸웠던 나라입니다. 고구려의 미천왕이 낙랑군을 몰아낸 시기가 313년 경으로 알고 있는데 고구려가 BC37년에 건국되었다고 해도 무려 300년 이상 중국의 한(漢) 제국과 전투를 계속 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수나라 당나라와도 고구려는 계속 싸웠지요. 왕의 결정에 따라 숱한 장정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극에서 자주 다뤄지는 인물이 몇명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장희빈입니다. 숙종 임금님때 기사환국이니 경신환국이니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당시 당파싸움의 여파로 우암 송시열 같은 대신조차도 사약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대신은 사형을 잘 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과 몇 백년 전에 임금의 여자 한 사람으로 인한 파장이 어마어마 했습니다. 대신마저도 사약을 받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지요.

 

고려 태조이신 왕건은 부인이 스물아홉분이나 계셨답니다. 왜 그렇게 결혼을 많이 하셨을까요? 후대의 설명을 보면 혼인정책이라는 관점에서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시대를 더 올라가 고구려 시대면 고려보다 1000년 정도 더 이전인데, 당시의 결혼이 그저 왕 개인의 결혼이었을까요? 왕이라는 지위와 무관한....?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구려보다 1000년도 더 지난 조선에서도 누가 왕비가 되고 후궁이 되느냐에 따라 숱한 목숨들이 왔다갔다 했으니까요.

 

하긴 황조가나 공무도하가나 구지가 등등 고대 시가를 학교 다닐 때나 잠깐 배우지 국문학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면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더구나 시험문제가 중요한 마당이니 "개인적 갈등과 좌절"을 노래한 서정시. 정답도 정해져 있고... 황조가는 평생 개인적 서정시로만 남겠네요. 그렇죠?

 

예전에 배울 때는 몰랐는데, 공무도하가에서도 자가 나오던데 河자는 원래 황하(黃河)를 뜻하는 글자입니다. 옛날에는 물마다 다 이름이 달랐지요. 요즘은 낙동강, 섬진강, 금강 등등 제 각각의 이름이 있지만 어떤 강의 이름을 모를 때 우리는 그냥 강(江)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안그랬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강(江)이라는 글자는 양자강을 뜻합니다. 이건 한문 고전을 보겠답시고 옥편이나 자전을 뒤져본 분들은 아실 겁니다. 그런데 공무도하가를 해석하면서 河자를 그냥 물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옥편이나 자전에 물 하(河)라고 설명을 하니까요. 맞는 해석일까요? 하(河)라는 글자가 물 이라는 뜻을 획득한 것은 황하라는 뜻보다 오래되지 않은 것입니다. 고대의 하(河)자가 당시에 쓰이던 뜻 그대로 황하를 뜻하는 것이라면, 당시의 시대적 기준을 반영하여 공무도하(公無渡河)라는 노래가사는 "님이여 황하를 건너지 마오" 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뜻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잘못 기록했다는 비판이 있는 역사서입니다. 반면,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런 것이지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중에 초기기록은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라고 한다네요. 고구려 유리왕은 고구려의 2대왕으로 삼국사기의 초기 중 초기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 하면서도 유리왕의 황조가에 대해서는 개인적 갈등과 좌절? 우와 실로 어마어마한 해설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역사학계와 국문학계간에 어떤 괴리가 있다고 해야 할까 뭐 그런 느낌도 들고요. 한쪽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또 한쪽은 개인의 갈등과 좌절을 표현한 서정시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으니까요.

 

왕은 절대로 개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인데, 하긴 그런 개인적 삶을 살지 못한 영국의 다이애너비는 파파라치들에게 쫓기다 결국 죽기도 했지요. 현대를 사는 왕이나 그 비빈들도 개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군왕의 말 한 마디가 곧 법이고 툭하면 전쟁이나 전투를 일삼던 고구려와 한의 투쟁기에 왕 개인의 삶을 조명하는 문학적 심미안이 놀라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