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님의 작품 광장을 검색하면 광장/구운몽으로 검색이 됩니다. 구운몽으로 검색을 해도 역시 결과를 표시하는 페이지에는 광장/구운몽 으로 결과들이 나열됩니다. 왜 광장이나 구운몽이 각각 별개의 작품으로 검색되지 않고 광장/구운몽으로 검색이 되는 걸까요. 혹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우리가 분수를 읽거나 표시할 때, 이분의 일, 삼분의 일, 또는 육분의 오 등으로 읽고 숫자로 쓸 때는 1/2, 1/3, 5/6 등으로 쓰는 것처럼 작품 제목 광장/구운몽은 구운몽 분의 광장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쨌거나 혹시나 해서 광장/구운몽을 읽었다고 소개한 블로그들을 클릭해서 들어가면 제목에는 분명 구운몽분의 광장 즉, 광장/구운몽 이라고 썼음에도 내용에는 광장에 대한 것만 적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책의 제목에는 분자와 분모가 정확이 구분되어 기록이 되어 있고, 분수의 경우 분모의 값에 따라 다른 숫자(의미)가 된다는 것은 상식인데 대부분 분수(유리수)로 된 제목의 책을 읽고 분자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요.
분수(유리수)는 분모의 크기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집니다. 분모를 무시한 분수(유리수)는 오히려 숫자일 수 없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광장/구운몽에서 분모는 구운몽입니다. 구운몽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광장의 의미 역시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분모가 무한대라면 광장의 의미는 0에 가깝게 되겠지만, 반면 분모가 1이라면 광장과 구운몽은 등가의 작품이 됩니다. 구운몽을 읽어보셨나요?
어쨌거나, 광장을 처음 읽었을 때 서문에 있는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라는 글귀를 보고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었을 때 "애개, 남쪽에 잠깐 살다가 북쪽에 잠깐 살고 전쟁포로가 되었다가 중립국으로 가는 배에서 갈매기 두 마리를 보고 환상 속에서 허우적대다 바다에 빠져 죽는 얘기네!"가 제가 느낀 전부였습니다. 감동은 고사하고 서문에서 말하는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년래의 풍문이나 코뮤니즘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풍문 같은 뭔가 스케일이 클 것 같은 그런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요.
그러다 얼마 동안의, 1년 2년? 기간이 지난 후, 우연히 김현 이라는 평론가가 우리나라에서는 제일로 알아주는 평론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김현이라는 분이 해설하신 다른 소설 작품을 읽게 되면서, 어! 이 분(故 김현)이 또 해설을 하셨네?" 라고 생각을 했었지요. 어쨌거나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평론가께서 60년대 최고의 소설이라고 평하신 작품을 읽고 감동은 커녕 별다른 느낌이 없었던 것에 갑자기 무식한 놈의 오기(?)가 발동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명작이라면 그렇게 유식한 분들 만큼의 이해는 아니라도 "아! 좋다" 라는 그런 느낌 하나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심사였던 것 같습니다.
광장을 다시 읽었습니다. 여전히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운몽을 읽었습니다. 구운몽 읽어보셨나요? 참 미치고 환장하겠습디다. 작품의 주인공이 숙을 만나러 아세아 극장 앞 미궁 다방에 갔는데 정작 작품을 읽는 제가(독자가) 미궁에 빠진 것 같은... 뭐 어쨌거나 희안한 느낌이었습니다. 도통 이게 무슨, 말이야 방구야. 젠장...
이명준이 바다에 투신하기까지의 연대기와 구운몽의 주인공 독고민의 나이를 비교하면 이명준과 독고민은 이름이 다른 동일인일 수도 있습니다. 구운몽에서 독고민은 그저 간판사에 불과한데 사람들은 그를 선생님(랍비로 번역될 수 있을까요?)이라고도 부르고 사장님이라고도 여기고 수령이라고 여기기도 하지요.
최인훈님의 전집에 2권이 회색인 이라는 작품이고 3권은 서유기라는 작품입니다. 차례로 사서 읽었습니다. 광장과 구운몽 회색인 서유기까지를 다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고서야 그나마 아! 그런 거였어? 하는 미약하나마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최인훈님의 전집 1권이 분량이 적은 작품 2개를 합본한 것이 아니라 구운몽 분의 광장 즉, 광장/구운몽 이구나 하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된 겁니다.
광장 작품 속에 "...아버지 아들인 그는 조심해야겠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구체적 정체를 작품의 맥락 속에서 알 수는 있지만 해당 문장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2000여년 전에 아버지 아들이 이땅에 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 분께서 말씀하시길 "말씀이 예언한 그가 바로 나이러라, 내가 바로 그니라" 하셨고 지상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가시면류관을 쓰고 채찍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십자가에 묶여 죽임을 당하시지요. (예수님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습니다. 그러나 멜 깁슨이 감독한 Passion을 추천합니다. 그 영화를 보는 와중에 소름이 돋았다고 해야 할까... 실제 그 영화를 보던 중에 미국에서는 기절하고 쓰러진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예수님의 공생애와 수난을 주제로 한 영화는 많지만 Passion of Christ (제목이 정확한지 애매하네요. 본지 오래되서 ㅡㅡ) 이라는 영화는 이전에 나온 영화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장에서 정선생이 이명준에게 "정치는 어떤가?" 라고 물었을 때 아버지 아들인 그는 힘이 약하다고 말을 합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아버지 아들은 "내가 바로 그니라" 라고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죽은 자를 되살리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멀쩡하게 하시는 등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고,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시며 여러 가지 가르침을 내리기도 하신 것과 달리 2000년 후의 아버지 아들은 형세판단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어떻게든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 것인지 자신은 그저 간판사에 불과하다고 말을 하는데도 사람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외치셨던 기억이 되살아 나신 것인지 아무런 이적을 행하지도 않고(못하고?) 아무런 설교도 또한... 그저 미약한 한 존재일 뿐입니다
아버지 아들이라는 말을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서문에 메시아가 왔다는 2쳔년래의 풍문... 이라는 글귀나 구운몽에 혁명군 어쩌고 저쩌고 하는 글귀를 접하고 보니 저 자신은 그렇게까지 소급해 생각해 본 것입니다.
해설을 읽어 보시면 작가이신 최인훈님이 작품을 여러 번 개작했고 서문 역시 적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광장을 읽을 때 "웬 서문이 이렇게 많아?" 했었지요. 1989년판 서문에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지 40년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럼에도 작가가 계속해서 작품을 고쳐 썼고 1989년에도 서문을 썼다는 것은 작가와 작가 최초의 잠수부 이명준과는 1989년까지 교신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포스트를 작성하면서 최인훈님을 고(故) 최인훈 이라고 표시하지 않았는데 작년엔가 돌아가셨습니다. 작가가 사망하면 작가가 심해 속에 내려 보낸 최초의 잠수부 이명준 역시 사망하는지 알 수 없으나, 무식한 놈이 대평론가가 명작이라고 평한 작품을 이해해 보겠답시고 나름 짱구를 굴려 본 것인데,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더니, 신비막측한 무공으로 구대문파를 아울러 무림맹주가 되어서는 마교를 무찌르고 무림을 평정하는 그런 감동... 그도 아니면 야동에서 남자 배우가 퍽퍽퍽퍽 할 때마다 여자 배우들이 Oh my god! Oh my god!을 외치는 그런 므흣함... 그런 게 딱 제 수준이었는데.. ㅜㅜ
여하거나, 광장이 전하는 메시지가 사랑이라면,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분자를 도출하게 된 구운몽이라는 분모는 무엇을 함의하고 있을까요? 선생님(랍비)과 사장님, 수령, 아버지 아들, 혁명군 방송과 정부군 방송... 그리고 구운몽에 등장하는 미이라의 형상(인물화석).
프랑스에서는 광장/구운몽 중의 분자 부분에 해당하는 광장만이 번역되어 소개되었답니다. 프랑스는 대혁명의 나라였고 공상적 사회주의니 과학적 사회주의니 하면서 이념적 갈등이나 대립이 있었던 곳이므로 분모에 해당하는 부분은 그들의 역사나 생활 속에 녹아있는 부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모가 반드시 구운몽이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요. 분모는 서유기(최인훈)일 수도 있고 회색인(최인훈)일 수도 있고 수상한 그녀일수도 있고 또는 내부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작가가 어떤 작품을 쓰는 경우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독자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해를 하거나 해석을 할 테니까요. 서유기나 회색인이 고뇌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면, 무엇인가를 위한 고뇌는 주인공 독고민만 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숱한 사람들 또한 했을 것입니다. 그런 고뇌를 분모로 사랑이라는 분자와 함께 구운몽분의 광장(광장/구운몽)이라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누구나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고뇌가 있지요. 개인의 광장에서 사랑하고 대중의 밀실에서 고뇌하겠지요? 그러나 또, 어느 것이 광장이고 어느 것이 밀실인지, 어느 것이 분모이고 어느 것이 분자인지 아리송합니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어떤 영상들을 보니까 자유한국당이 집권하면 야동을 볼 수 있다는 것 같았습니다. 민주당이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려고 한다는 등 하면서요. 또 어떤 영상에서는 구글(Google)이 자체적으로 필터링해서 야동 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게 해준다고도 하더군요. 야동이 더욱 사랑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습득하는 수단인 것인지 아니면, 사랑이라는 분자를 도출할 고뇌가 없어져 야동 그 자체가 고뇌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야동이 그려내는 장면들은 광장일까요, 밀실일까요?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년래의 풍문이 있었습니다. 코뮤니즘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풍문도 있었습니다. 자유한국당이 집권하면 야동을 볼 수 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구글이 HTTPS를 암호화 한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살아왔고 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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