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에서 한사군이 어디에 있었느냐? 패수는 또 어디였는가? 또 평양은 한 군데만 있었을까? 지금의 요동이 고대의 요동이었는가?(요동의 위치는 시대별로 달랐다) 등이 오랫동안 매우 논쟁되고 있는 중대한 사안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 보탠다면 치우천왕와 공손헌원의 탁록대전에서 누가 이겼나? 하는 것도 하나의 논쟁(?)인 것으로 압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이겼다고 주장하니까요.
우리나라 민족사학계에서는 치우천왕이 공손헌원을 신하로 부렸는데 거리가 있어서였는지 마침내 지맘대로 하고 까불다가 치우천왕님께 혼쭐이 났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싸그리 죽이려다 아무리 무지한 족속들이라도 인명을 함부로 죽일 수 없다하여 치우천왕께서 물러나셨다고 설명하지요.
반면, 중국측에서는 공손헌원이 태어날 때부터 어찌나 똑똑하고 영민한 지 모르는 게 없고 거시기해서 짱먹었는데, 오직 치우 하나만 워낙 사납고 막나가는지라 헌원 뿐만 아니라 누구도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고 하다가 마침내 치우를 잡아 죽였다고 설명합니다.
치우천왕이 죽었다는 내용에 대해서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내용은 공손헌원이 치우천왕을 죽인 것이 아니라 치우천왕의 부하 장수 하나가 잡혔고 죽임을 당했다고 설명합니다. 치우천왕이 공손헌원에 의해 잡혔다는 내용은 사기(史記)나 기타 중국 사서에서 그렇게 기술하고 있다고 하는데, 반면 치우천왕과 그 형제 및 장수들이 모두 동두철액(銅頭鐵額 : 머리는 구리, 이마는 쇠 즉 갑옷과 투구) 이므로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치우천왕과 그 형제 81인 또 그 부하 장수들이 모두 투구와 갑옷을 입었으므로 겉으로 봐서는 누가 누구인지 분별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결국 갑옷을 입었던 까닭에 누가누구인지 구별하지 못하여 아무나 잡아 죽이고는 "이가 바로 치우다" 라고 공손헌원을 지지하는 여러 종족들에게 대대적으로 뻥을 친 것이지요.
한편, 전쟁에서 군사력의 차이가 나더라도 한쪽만 일방적으로 희생당하지는 않습니다. 그에 따라 노획물이라는 것이 발생하지요. 공손헌원에게 잡힌 치우천왕의 부하장수는 단지 죽음만 당한 것이 아니라 갑옷 및 무기에 대한 신기술까지 제공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이렇게 탁록 대전에 대해서 중국측의 주장과 우리나라의 입장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누가 승자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치우천왕께서 패하지는 않으셨으리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탁록대전의 결과 이후 중국은 현재의 중국(China)땅에서 성장을 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고대사에서는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우리 역사가 발전했고 지금의 중국 북경 및 현 중국의 동부해안과 섬서성 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고 설명하는데, 탁록대전에서 공손헌원이 이겼다면 마땅히 그 성장방향이 북경을 넘어 만주로 향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만주를 포함한 만리장성 밖에는 강성한 세력들이 있어서 공손헌원이 어찌해 볼 수 없었다는 뜻인 겁니다.
워낙 고대의 일이라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기도 하지만, 가령 우리나라 역사에서만 해도 중종반정이니 인조반정이 있었습니다. 연산군을 폐위한 후 반정군이 한양(지금의 서울)을 버리고 경상도나 전라도에 터를 잡아 새 나라를 세웠나요? 인조반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광해군을 몰아낸 후 한양(지금의 서울)을 버리고 평안도나 함경도에 새 나라를 세웠나요? 아니라는 거 다 아시죠? 결국 치우천왕과 공손헌원의 대결에서 공손헌원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치우천왕이었다는 뜻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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