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부의 내용이 황당할 수 있지만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숩니다. ^^;;
치우의 군대는 천하무적?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치우는 노산(盧山)의 금으로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는데,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용어하도에 이르기를 '황제가 섭정을 할 때 치우와 그 형제 81명이 있었는데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 말을 한다.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가졌고, 모래와 돌을 먹는다. 병장기로 칼, 창, 큰 활을 만들어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고 한다" 『사기』 (원문은 생략)
라고 하여 치우천왕이 모래와 돌을 먹었다고 합니다. 모래와 돌을 먹는 군대라니 이는 천하무적이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밥을 말아먹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조금 질퍽하더라도 진흙조차 먹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보면 온 세상에 널린 것이 식량이 되는 셈?이지요. ㅡ,.ㅡ
중국에는 열국지, 초한지, 삼국지(삼국연의) 등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들이 여럿 있습니다. 저는 초한지는 읽어보지 않았고 열국지도 한 두 번 읽었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보통 삼국지라고 하는 삼국연의는 그래도 몇 번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삼국연의에서 식량에 대해 처음 나오는 부분이 아마 동탁을 치기 위해 18로 제후가 모였을 때, 손견이 원술에게 식량을 요청하지만 식량을 지원받지 못해 패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식량이 없다는 이유로 패전을 하였으니 전투나 전쟁에서 식량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삼국연의 후반부를 보면, 장수들끼리 서로 양초(식량과 기타 군수품)을 화공으로 태우거나 뺏거나 보급로를 차단하거나 하는 전략을 상당히 중시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수 전쟁(고구려 VS 수나라)이나 고당 전쟁(고구려 VS 당나라) 등에서 청야전술을 펼치는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청야전술은 말 그대로 식량이나 말이나 소 등이 먹을 풀 등을 모두 성 안으로 옮겨서 들판을 비우는 전술입니다. 그 만큼 식량은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치우(치우천왕)는 정말 모래와 돌을 먹었을까?
치우천왕이 모래와 돌을 먹었다는 내용은 요재지이나 산해경 같은 무슨 신화나 전설을 기록한 책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중국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라는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상식적으로 사람이 모래나 돌을 먹고 살 수는 없는데, 설화집도 아니고 민담집도 아닌 역사서에 치우천왕이 모래와 돌을 먹었다고 기록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치우천왕이 중국의 황제(黃帝)라 불리는 공손헌원과 싸움을 하려고 진을 친채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한 번 가정해 보려고 합니다. 양군의 진채가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을 지는 알 수 없으나 서로가 군사의 숫자, 무기의 종류나 식량의 보유 정도 등을 정탐할 것입니다.
치우천왕과 헌원 양군이 서로 사자를 보내서 "이것이 우리가 이번 전투에 쓸 무기이며, 병력은 몇 명이며, 말은 몇 마리고, 이것이 우리가 먹을 식량이고 얼마나 보유하고 있다"며 친절하게 설명하며 전투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므로 상대방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하는 정찰이나 정탐에는 일정한 거리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즉, 당시 사기(史記)를 기술한 사마천이 참고한 자료에는 - 무엇인지 모르지만 - 치우천왕 및 그 군대가 모래와 돌을 먹었다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고, 치우천왕과 헌원이 전투를 할 당시 - 탁록대전 - 헌원측 정탐병 눈에는 그것이 모래나 돌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중국 역사서의 고질이라고 하는 상대방 비하의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국 이외의 국가나 민족을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 정탐병의 눈에 보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면, 그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망원경도 없던 시절 당연히 사람의 눈에 의거해서 정찰을 하고 정탐을 했을 것이니까요.
미숫가루를 아십니까?
요즘은 워낙 먹을거리가 풍부하여 간식거리로 떡뽁이, 어묵, 초콜렛, 사탕, 과자, 과일 등을 쉽게 먹을 수 있지만, 제가 어릴 때는 간식으로 삼을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미숫가루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대형 마트나 온라인 상점 등에서 판매를 합니다.
미숫가루는 여러 가지 곡식을 익힌 뒤 빻아서 만든 가루입니다. 그것을 그냥 숟가락으로 떠서 먹기도 하고 물에 타서 먹기도 하였습니다. 냉장고가 생기고 나서(40년 전? 냉장고 별로 없을 때) 얼음을 타서 먹을 때는 더욱 맛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미숫가루 라는 것이 조금 멀리서 보면 모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색깔만 본다면 모래와 구별이 어려울 것입니다. 혹시 헌원측의 정탐병이 본 것은 혹시 미숫가루가 아니었을까요?
몇 천년 전에 무슨 미숫가루... 라고 할 수 있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처럼 똑같이 미숫가루라고 부르지 않았을망정 곡물을 빻아 만들었을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래는 미숫가루라고 하자 그렇다면 돌은 어떻게 설명할래? 모래와 돌을 먹었다 라고 하잖아... 라고 한다면, 우황청심환 또는 정로환 등을 검색해 보시길 권하겠습니다.
우황청심환이나 정로환 등은 모두 구슬처럼 생긴 한약입니다. 정로환은 직경 5mm 정도이고 우황청심환은 직경이 1cm 정도 됩니다. 우황첨심환은 표면에 금박이 있기 때문에 금색이지만, 제가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미숫가루 외에 역시 각종 식자재나 약재를 우황청심환이나 정로환 같은 작은 구슬 형태(丸:환)으로 만들어서 먹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정탐병이 보기에는 자잘한 자갈(돌)을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일개 대중 독자라서 사료적 근거? 뭐 그런 거는 모릅니다. 다만, 모래와 돌을 먹었다는 내용을 역사서에 기록했다는 까닭으로 - 역사서는 실제던 왜곡되었던간에 어쨌거나 사실을 기록하는 책이므로 - 그 숨겨진 뜻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기를 기록한 사마천도 사람이 모래나 돌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사마천이 사기를 기록하면서 오제본기로 시작합니다. 삼황에 대한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지요. 신빙성을 확신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할 수 있는 역사가가 근거없는 기록을 포함시켰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해당 내용이 사기 오제본기 본문에 포함이 되어 있는지 아니면 사기색은이나 사기집해 같은 주석에 포함이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전투식량 제조의 시초, 치우천왕
사람이 모래나 돌을 먹었다는 내용은 황당할 수 있지만, 반면, 어쩌면 무려 수 천년 전에도 전투식량의 개념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적군의 눈에는 모래나 돌로 보였을 먹을거리가 실제로는 전투를 위한 전투식량으로 특별히 제조된 음식일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식품을 목적에 따라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미숫가루를 혹시 보셨다면 물기(수분)이 없습니다. 모든 곡류는 부피가 있고 수분을 함유하고 있는데 수분은 부패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또 수분을 제거했기 때문에 운반도 훨씬 쉽게 됩니다. 현재(AD 2020년)에 제조되고 있는 전투식량도 물기(수분)를 완전히 빼서 밀봉 포장을 하는 것으로 압니다. 거기에 뜨거운 물 등을 부어서 조리해서 먹습니다. 현대적 개념과 같은 수준의 기술을 적용할만큼 고도화되지는 않았을망정 전투식량을 제조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대의 식품 가공 기술... 뭐 이러면서 국뽕으로 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ㅡ,.ㅡ
여러분들도 한 번씩 생각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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