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중앙박물관 가야 특별전 전시회를 두고 김해 허씨 대종회 회장이신 허성관 이라는 분이 가야 특별전을 준비한 역사학자들을 사기꾼이라고 하는 내용의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네요. 허성관 이라는 분은 고(故) 노무현 정부 때 장관을 역임하신 분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김해 허씨는 김수로왕의 후손입니다. 김해 김씨가 아니라 김해 허씨라니 성씨가 다른 것이 의아하지요? 어쨌거나 전 장관이셨고 또 김해 허씨 대종회 회장이신 허성관 님이 출연하셔서 하시는 말씀이, 가야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는 와중에도 가야 역사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가야특별전이 왜곡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걱정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영상 중에 나옵니다. 가야 특별전을 임나일본부를 지지하는 학자들만 참여할 것이다 라고 이미 예상을 하고 계셨다고 하네요. 대한민국에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는 역사학자들이 많은가 봅니다.
www.youtube.com/watch?v=0m95Sc7FO_s&list=TLPQMDYwNTIwMjE9rqs_Qoe_-A&index=4
허황후의 무덤은 김수로왕릉보다 지리적으로 북쪽에 위치에 있습니다. 허황후가 죽을 때, 살아서는 김수로왕의 아내로 살았지만, 죽어서는 김수로왕보다 높은 곳에 묻혀야 하겠다고 유언하여 묘를 한 군데에 쓰지 않고 더 높은 북쪽에 썼다고 합니다. 여성의 지위가 무시되지 않았다는 뜻이거나, 또는 허황후의 친정이 김수로왕보다 우위에 있었던지 어떤 까닭이 있겠지요?
위에서 김해 허씨의 후손이라고 하여 김수로왕의 후손인데 성씨가 다르다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김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 자녀가 몇이나 태어났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들 중에 누군가를 허씨 성을 받아 성씨를 잇게 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즉, 자녀들 중에 누군가는 김해 김씨로 성씨를 잇고 또 누군가는 김해 허씨로 성씨를 이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성씨가 계승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학의 전통이 오랫동안 전승되던 현재의 우리 풍습과는 다르지만 고대에는 그랬다고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1권을 보시면 참고할만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1권 5년조에 나오는 기사입니다. 박혁거세가 알영을 신부로 맞아들이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시 사람들이 박혁거세와 알영 두 분을 일컬어 二聖 이라고 칭했다는 것입니다.
五年 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老嫗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名之, 及長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行能內輔, 時人謂之二聖
혁거세 즉위 오년 봄 정월, 용이 알영우물에 나타났다.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아가 태어났다. 어느 노파가 그 신이한 광경을 보고 거두어 기르며, 우물의 이름을 아이의 이름으로 삼았다. 성장하여 덕을 행하였다. 시조 혁거세가 그 사실을 듣고 아내로 맞아들였고 현명하게 보좌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혁거세 알영 두 분을 가리켜 두 성인(聖人 : 二聖)이라 하였다. (원문을 보면서 제가 해석을 써 넣은 것이라, 정확한 번역이라 자신할 수 없습니다. 어째 이 문장이 해석이 되네요. ^^;;)
유학에서 공자나 맹자 등을 성인(聖人)이라 부르는 것과 다른데, 중국에서 유래된 유학에서 여성은 성인(聖人)으로 추앙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성은 교화되지 못하는 존재로 설명됩니다. 사서(四書) 중 대학을 주석까지 있는 책을 읽어보셨다면, 주자(朱子)가 그렇게 설명하는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은 교화되기 어렵다고 설명하고 있으므로 정확하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꼴통이라는 말인지, 그도 아니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 중 암컷이라는 뜻인지... 뭐 더 이상의 설명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부터 인의예지의 성을 부여받는다는 주자장구 서문의 내용에 비추어보면 모순이지요. 여성은 교화되기 어렵다고 하였다는 것은 여성은 인의예지의 성을 부여받지 못한다는 말처럼 생각되니까요. 어쨌거나 중국(China)과는 다르게 우리 고대에는 여성 역시 성인(聖人)으로 추앙하였다는 것입니다. 해당 내용으로 가야사를 비추어 보면 가야에서도 김수로왕과 허황후 두 분을 아울러 두 성인(二聖)이라 하였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역사는 계속되는 한족(漢族)이나 왜(일본)의 침입으로 수 많은 역사서들이 사라졌고, 고대의 모습 뿐만 아니라 대진(발해)과 고려 등의 모습조차도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민족의 침략이 잦았지만 우리의 역사서나마 계속 전해졌다면, 여성도 성인으로 추앙하던 우리 고대의 모습을 알 수 있었을텐데 그런 면에서 아쉽기는 합니다. 고려사가 전해지지만, 고려와 달리 조선왕조는 명(明)에 사대하였으므로 조선왕조에서 저술한 고려사는 정확하게 전승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하더군요.
한편, 김수로왕은 왕이라 부르는데, 어찌하여 그 아내는 황후라고 칭하느냐 하는 것도 문제일 수 있습니다. 왕(王)은 황제(皇帝)보다 등급이 낮은 임금을 뜻하는 글자이고 그에 따라 김수로왕의 왕비는 허황후가 아니라 허왕비라고 칭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제와 왕 사이에 천왕이라 칭하는 것은 중국 주(周)나라에서 있었습니다. 주나라가 역성혁명으로 당시 중국 지역의 종주국이 되었으므로 당시에 전해지던 최고통치권자를 칭하던 명칭인 帝(임금 제)를 쓰지 못하고 한 등급 낮은 글자인 왕(王)으로 칭한 것이지요. 옛날에는 글자 하나를 매우 까다롭게 썼습니다. 소위 피휘라는 것을 아신다면 한자(漢字)라고 하는 글자는 함부로 쓰지 못했다는 말이 되지요. 그러므로, 왕의 부인이 황후라는 것은 모순 아닐까요? 황후는 황제의 부인을 칭하는 호칭이거든요. 가야사 뿐만 아니라 우리 고대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현재의 상식으로 의구심이 드는 것을 말해 본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검색을 해 보시면 가야사 특별전에 대해 비판하는 영상들이 많습니다. 비단, 가야사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의 역사마저 곳곳에 조작,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단군이 신화라고 규정하면서 반만년 역사 중 3000년이 시간적으로 축소되고 공간적으로도 한사군을 북한 평양 지역에 비정함므로써, 고대부터 중세, 근대까지 시간적 공간적으로 알뜰히(?) 조작하고 왜곡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조작질을 해방이 된 지 70년도 더 지난 지금도 하고 있다는 것은, 허성관 전 장관이셨고 김해 허씨 대종회 회장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대한민국 역사학자들이 사기꾼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인은 한국의 역사를 읽지 않는다는 100여년 전의 지적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일본이 한국인은 거지 발싸개 같은 것들이라 중국이나 일본이 문명을 전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거지발싸개 꼴로 살았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사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한사군재한반도설이나 임니일본부설이 모두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일본은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했을까요? 그리고 아직까지 역사 조작이나 왜곡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인은 역시 거지발싸개들로 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BTS가 아무리 날고 뛰어도, 블랙핑크가 아무리 예쁘고 춤을 잘 추어도, 니들 조센징들은 일본이 아니면 지금도(AD2020~) 여전히 거지발싸개야 라는 것을 가야 특별전을 통해서 말한 것 같습니다. 한국인들이 거지발싸개 꼴을 면하려면 역사를 읽어야 한다는 말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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