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조희승 저, 이덕일 해설)라는 책이 현재 대한민국 시중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책은 올해 1월 21일에 구입을 했는데 오늘에서야 근근히 한 번 읽어보게 되었네요. 역사에 문외한이고 가야 유물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입장이라 상당부분은 지루한 책이었습니다. 사진 자료 없이 옛 가야 지역에서 발굴되는 토기나 철제 무기, 장신구, 지형 등의 모양이나 형태를 글로 설명하는 내용이 태반이라 앞을 못보는 사람에게 누군가 옆에서 말로 설명해 주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소 가야 유물에 대해서 상식적으로 알고 있고 소백산 이남을 자주 여행하신 분이라면 매우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책이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가야사에 대한 아무런 상식이 없는 입장에서도 정리가 잘 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책을 구입하지 않더라도 인근 도서관 등에서 빌려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혹시나 소백산 이남을 자주 여행할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학술서적의 차원을 넘어서 훌륭한 여행가이드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가야사 연구를 여행 가이드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가야 토기나 철제 용구들과 금관, 장신구 등 가야 유물에 대한 사진 자료나 지형들에 대한 설명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요. 구글 어스(Google Earth)가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책의 앞부분에 사진 자료가 있기는 하지만 내용 전개에 따라 내용에 맞는 사진 자료가 다 인쇄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책의 끝부분에 해설을 하신 이덕일 소장이 "북한학계의 가야사를 읽으면서 느꼈던 점은 가야는 남한 영토에 있는데도 정작 그 구체적 내용은 북한학계의 가야사에 담겨 있다는 점이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야사에 관해서 이전에 읽어본 책이 거의 없는데도 저 역시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남북이 분단되어 남한 지역에서 활동에 제약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어떻게 이렇게나 자세히 기술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혹시 남파간첩들이 했던 일이 역사자료 수집이었을까요? ^^;;
책을 읽으면서 가장 신기했던 것 한가지는 옛 가야지역에서 발굴되는 토기 중에 수레바퀴 모양을 한 토기가 있는데, 그 수레바퀴가 손으로 돌리면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고 그냥 붙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꼼꼼하고 나름 정밀한 제작과정을 거쳤다는 말이 됩니다. 가야사 연구를 읽지 않았다면 아래 사진의 토기에 붙어있는 바퀴가 회전한다는 것을 죽을 때까지 몰랐을지도 모르겠네요. 반면, 저 토기를 실제로 눈 앞에 두고 돌려보지는 못했습니다. 역사학자가 아니면서 호기심만 많은 것이 이럴 때는 참 아쉽습니다. 혹시나 역사 관련 방송을 제작하게 되는 경우 해당 토기의 바퀴가 실제로 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그런 내용이 한 번은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모조품을 만들어서 원본 가야 토기는 보존하고 옛 가야의 공예가 어떠한 수준이었다 하는 면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019년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가야본성(伽倻本姓) 이라는 제목으로 가야특별전을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가보지 못하였습니다만 2019년에 전시된 가야특별전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근거가 아니라 일본서기를 근거로 지명 설명을 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덕일 역사TV 참고) 가야 특별전이 아니라도 임나일본부를 긍정하는 학설이 대한민국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는 것은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에서는 임나일본부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면 임나일본부설이 대세인 나라를 살게 되는 희안한 상황으로 이해됩니다. 동네 막노동꾼에 불과하지만 한마디로 기만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배우는 최종적인 역사 교육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기술하지 않았다면 대학교수 아니라 대학교수 할애비라도 임나일본부라는 말을 꺼내면 안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하네요. 그런 의미에서 혹시나 제 블로그에 들러 이 포스트를 보시는 분이 계시다면 가야사 연구라는 책을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역사에 문외한이고 역사서적을 꾸준히 읽은 것도 아니고 또 가야사에 대한 구체적인 상식도 없으면서 가야사 연구를 읽으라고 권하는 것은 모순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야사 연구를 읽어보시라 권하는 나름의 근거는 몇 가지 있습니다.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VS 우리 안의 식민사관
이덕일 박사가 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라는 책을 내어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라는 책을 비판하면서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를 식민사학자라고 평했습니다. 그로 인해 명예훼손으로 소송이 있었습니다. 해당 재판에서 김현구 교수가 자신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모른다고 말했답니다. 교차검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나, 가야사 연구에는 부분적으로나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비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다만, 가야사 연구 책 후반에 임나일본부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내용에서 수충정난공신... 어쩌고 저쩌고 하는 김부식이 가야사를 배제한 까닭으로 가야사에 대한 문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공백이 생긴 까닭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교차검증이 가능한 이야기를 사서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판적인 내용 이전에 책의 시작부분부터 6가야를 설명하는 곳곳에서 일본의 노략질을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가야유물을 참빗처럼 훓었다는 내용이 가야사 연구 후반부에 있는데 참빗이 뭔지 아시나요? 옛날에는 요즘처럼 머리를 자주 감을 수 없었기 때문에 머리에 생기는 이나 쎄가리(이의 알) 등을 걷어내기 위해서 폭이 매우 좁은 빗을 썼고 그것을 참빗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임나일본부라는 설을 사실인 것 마냥 주장하기 위해 김해 및 옛 가야 지역의 유물을 발굴하면서 철저히 조사하고 무덤들에서 나온 유물을 수탈해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을 사는 여성들이 이나 쎄가리를 알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참빗은 각 살의 폭이 0.5mm도 아마 안될 겁니다. 저도 본지 오래되어서... 그 만큼 철저히 가야 유물들을 수탈해 간 것인데, 그럼에도 전해지는 역사문헌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딛고 발굴되는 유물의 발전 정도를 추적하여 어느 것이 먼저이고 또 어느 것이 나중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故)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
저는 최재석 교수가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최재석 교수께서 쓰셨다는 책이나 논문은 단 한 권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다른 책을 통해서 평생을 가야사 연구에 매진하셨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한일 고대사 관련 저서와 연구논문을 발표하신 분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가야사 연구 후반부의 이덕일 소장의 해설에도 나옵니다. 고구려 역사재단이 동북아 역사재단으로 명칭을 바꾼 후 일본서기 역주본을 세권으로 간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간행한 일본서기 역주본의 참고문헌 목록에 고(故) 최재석 교수의 저서나 논문은 단 한 편도 인용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에 따라 당연히 최재석이라는 학자의 이름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본서기라는 책을 대한민국에서 왜 역주본을 만들었겠습니까. 상호참조, 교차검증을 위해서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한일 고대사 관련하여 가장 많은 저술과 논문을 발표한 분의 연구결과가 단 한 편도 인용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고 하네요.
유튜브에 업로드 된 영상 중에 낙랑군과 관계된 국회 역사관련 청문회에서 송호정 교수와 국회의원이 질의 응답하는 영상이 있습니다. 윤내현 교수가 재야사학자냐? 라고 의원이 묻는데 송호정 교수가 그렇게 질문하지 마십시오. 라고 답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송호정 교수가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재야사학자들의 연구결과, 즉 저서나 논문 등을 전혀 인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임나일본부를 위시한 한일 고대사 문제 뿐만 아니라 고조선이나 부여 고구려 등 북방 고대사 역시 끼리끼리만 논문이나 저서를 인용하여 일방적인 서술을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를 읽어보면 이병도, 노태돈 등등 기존 강단사학계의 논문이나 논리를 인용하는 부분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학문이 뭔지 모르지만 저 같으면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나 한국 열국사 연구를 읽겠습니다. 다양한 학설을 수용하고 비판하고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한일 고대사 부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펴내는 가야사 관련 서적보다는 북한 학계에서 펴낸 가야사 연구를 읽겠습니다.
저는 무식합니다. 못배웠습니다. 우연찮게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온라인 서점의 목록에서 보게 되었을 때, 이주한 이라는 그 책의 저자가 제 눈 앞에 있었다면 어쩌면 C8 소리와 함께 주먹부터 한 방 날렸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만큼 무식하고 무지합니다. 그러나, 이주한이라는 저자가 제 눈 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 무슨 소리인지 한 번 보기나 하자! 싶어서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는 책을 주문했고 읽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읽게 된 것이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또 읽게 된 것이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라는 책이고... 뭐 그 이후로 대한민국 역사학계를 비판하는 책을 연달아 몇 권을 읽게 됩니다. 그 중에서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병신들만 교수가 된다는 말은 충격이기까지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무식합니다. 혹시나 제가 이덕일이나 이주한, 김상태 등 여러 분들의 책을 읽기 전에 김현구 교수의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라는 책을 먼저 보았다면, 역시 고려대 교수야! 라면서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라는 책이 명저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제목과 총론과 각론 문장 하나하나를 따지면서 읽을 수 있을만큼 독서에 대한 내공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이덕일 역사TV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게 되면 볼 때마다 총론과 각론의 차이를 설명해 주셔서 속으로 매번 감사를 드립니다.
동조동근론...(한자생략)
조선을 강제합병하면서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운 논리 중에 내선일체니 동조동근이나 하는 여러 주장들이 있습니다. 동조동근으로 표기하고 제목에서 한자를 생략했지만 그냥 간단히 말하면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그 조상이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인지 대한민국 방송사에서 고대사 관련 프로그램이 제작되면 유독 일본 거리를 헤매는 장면을 많이 보게 됩니다. TV 안보고 산지 10년이 넘어서 지난 10여년 동안은 대한민국 방송사에서 제작되는 역사 관련 방송을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고대사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일본 거리를 해메고 다니는지는 모르겠네요. 역사에 대한 사실성의 진위 여부를 추적하려는 것이니 무조건 비난이나 비판을 할 수는 없지만 유독 일본 거리를 많이 헤매는 듯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환단고기가 대중에게 많이 읽혀져서인지 어느 때부터 중국을 드나드는 모습도 보이긴 하더군요.
한편, 고려시대에는 무신정권기라는 일정 기간이 있습니다. 무신들이 문신들의 차별에 반발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위세를 떨친 시기인데, 그만큼 문신이 무신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고려를 이은 조선시대에도 무신들 보다는 문신이 더욱 대접받았습니다. 반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까지만 해도 무사적 전통이 확실한 우위를 점한 채 이어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조동근이라면서 한 쪽은 문인적 전통이 이어지고 다른 한쪽은 무사적 전통이 이어졌다는 것은 최소 1000여년간 한일 간에는 소통이 거의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일본이 서구적 공업기술을 선취하면서 조선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들고 나온 것이 동조동근 이론이지요. 뭐 비슷한 것으로 일선동조론 같은 것도 있습니다.
가야사 연구만 읽어봐도 가야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여러 주민들이 일본 열도에 건너가서 분국들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과의 역사적 친연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동조동근론을 앞세우기에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욱 도드라진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혹시나 1000여년 전쯤 전에 왜가 고려나 조선을 군사적인 무력을 앞세워 병탄하고 그와 같은 논리를 주장했더라면 그만한 설득력을 획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 봅니다. 그러나, 불과 100여년 전까지도 사무라이 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회를 장악하던 나라에서 그런 논리를 앞세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그토록 사랑하는 삼국지(삼국연의)에서도 군웅할거 시대 이전에 승상이라거나 사도(司徒)라거나 하는 문관이 나라를 주도했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단지 무사적 전통과 관례만이 그득한 시대였다면 뭣하러 조조가 스스로 위왕을 자처하면서 헌제 밑에서 찌그러져 있었겠어요, 그냥 갈아엎지. 조조는 무력을 앞세워 위왕이 되었지만 최소한 사필(史筆)의 엄정함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만 봐도 태종 임금님이 보위에 쉽게 오르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조선시대를 넘어 무려 2000년 전에 있었던 일조차도 이해 못하는 일본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맨날 치고박고 싸우는 것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정치는 가장 현재적인 이해관계를 반영합니다. 그리고 일본에는 문사가 우위를 점했던 그런 역사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최소 1000년 이상을 조폭같은 무사집단들의 근시안적 시각과 관점으로 지금껏 살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런 면에서 참으로 안타깝에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야쿠자가 이제는 없다면서요. 2011년에 일본에서 무슨 폭력배제조례? 뭐 그런 것이 생겨가지고 야쿠자가 옛날처럼 일본 사회를 활보하지는 못하나 보더라고요. 해당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사실은 한 달도 안되는데 일본에서 야쿠자가 사라진것이 10년이나 되었다는 것이 진정 의외였습니다. 하지만, 세살 버릇 여든간다는 말은 꼭 해주고 싶네요. 명목상의 야쿠자는 사라졌을지언정 세계 어디에서나 폭력을 기반으로 세를 얻어 활동하는 단체들은 있기 마련이지요. 아직까지는 일본에서 야쿠자라는 이름이 사라진 것이지 실질적인 단체들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은 뭔가 일본 내부에서도 국제정세나 기타 어떤 변화를 감지했다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지금처럼 위안부 강제노역 독도 도발 등등 오만 갖가지... 에궁 그만 두십니다.
수 십년 동안 삼국연의 관련 컨텐츠를 가장 많이 쏟아내는 곳이 일본으로 알고 있는데, 맨날 치고 박고 싸우는 전투나 장수들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한나라 라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한 것은 무신들이 아니라 문신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안정기를 문신들이 이끌었다고 하지만 무신들이 뒷받침을 했겠지만요. 그러나 문신이 그 역할을 못하면 무신이 그 사회나 국가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는 혼란에 빠지는 것으로 압니다. 18로 제후군처럼... 17로인가? 젠장 삼국연의를 그래도 살면서 한 대여섯번은 읽은 것 같은데 17로인지 18로인지도 모르겠네요.
동조동근이라는 소제목으로 너무 주절거렸지요? 그러게 너무 차이가 나잖아요. 잘라파고스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스크롤을 하고 보니 적지 않게 주절거렸네요. 송구합니다. ㅡ,.ㅡ
제가 20대에 이런 책을 볼 수 있었다면, 늦어도 30대에 이런 책을 볼 수 있었다면 싶을 정도로 가야사 연구는 정말 잘 써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두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앞 못보는 장님에게 누군가 말로 설명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지만 6가야 각각에 대한 개별적인 설명을 항목별로 조목조목 유적과 유물을 들어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가야 유물에 대한 상식적인 내용을 알고 소백산 이남 지역을 종종 여행했더라면 정말 좋은 책을 얻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불행히도 가야 유물에 대한 사전지식이 거의 없고 소백산 이남으로 여행을 다닌 일도 거의 없어서 너무나 아쉽기도 했습니다.
해당 서적 가야사 연구를 읽으면서 딱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요시이강? 아사히강? 그런 강이 가야사 연구 책에 나오는 지도에도 표시가 되어 있지 않고,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거의 안나오더라고요. 그런 것은 못내 아쉬웠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지만 임나일본부 해부라는 책을 가지고는 있어서 펴 봤더니 요시이강이 표시된 지도가 있었습니다. 두 책을 모두 읽어 본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는 한 권만 읽어 본 입장에서 가야사 연구에 말로만 설명되어 있는 내용들을 확연히 느낄 수 있도록, 편집하는 분들이 지도 몇 장을 추가하셨다면 훨씬 더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사실, 책 속에 나오는 그림을 대체하여 내용 전개에 따라 가야 유물 사진을 포함시켜 분량이 좀 늘어나더라도 그렇게 책을 구성했다면 너무나 훌륭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책은 비싸질 것이 뻔하고 대한민국에서 몇 명이나 가야사 연구를 읽겠답시고 주머니를 열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습니다. 그 외에 아쉽다기 보다는, P421쪽에 김태식 교수를 인용하면서 일본학자 스에마쓰의 논리 일곱가지 중 3개는 빠져 있는 것 등이 있습니다.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그 다음에 그냥 일곱번째로 넘어가요. ㅡ,.ㅡ
쓰다 보니 장문의 포스트가 되어 버려 위 단락에서 멈추려 했지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야사 연구를 읽어보시면 가야 사회가 노동력 착취가 상당했다는 것을 전제로 내용이 전개되는 것인데, 개뿔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 내용에 대해서는 찬성하기가 힘드네요. 이는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 연구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고조선 사회가 고도의 노예제 사회였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니까요.
대한민국에는 씨족제도가 발달하여 본관 제도가 현재에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김해 김씨, 밀양 박씨, 경주 최씨, 안동 권씨 등등입니다. 그 외에도 대한민국에 대략 250여가지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저마다 제각각 본관이 있을 것입니다.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책화라는 제도를 말하기 이전에 누 천년간 한반도에는 본관제도가 뿌리내릴 만큼 지역에 따른 구분이 명확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고도의 노예제 사회가 발달했다는 전제는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역사 전문가가 아니라 일개 서민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막노동꾼에 불과하지요. 다만, 리지린 고조선 연구나 가야사 연구 등에서 고도의 착취 구조를 전제하는 것에 대한 반론으로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려 합니다.
조한 전쟁이(고조선과 중국 한나라와의 전쟁) 기원전 108년에 있었습니다. 조한 전쟁 이전에 중국에서는 춘추 전국시대가 있어서 전국시대의 맹주 진(秦)이 중원을 통일했지요. 그러나 그 여파로 적지 않은 유민이 발생했습니다. 그 유민들 상당수가 만주나 한반도 방향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진시황의 통일 전쟁 전까지만 해도 고조선이 장악하고 있던 영역에는 고대의 고강도 노예제 사회가 성립되어 있지는 않았는데 전국시대의 풍파로 소속이 불분명한 유민들이 급증하면서, 또 중국 한나라와 군사적 갈등을 하게 되면서 원치않는 고강도 노예제 사회로 진입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고대 중국이 한민족(韓民族)에 관한 역사 기술을 한 것이 조한 전쟁 이후부터 활발해 졌으므로, 갑자기 불어난 유민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변화상을 중국인이 중국인의 관점으로 오해하여 기술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를 기록한 우리 전래의 역사서가 탈취되거나 불에 타는 등 없기도 하고요.
반면,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를 읽어 보면 청동기가 도입되면서 급속히 생산력이 발달하여 계급 분화가 더욱 가속화 되었고 공고화 되었을 수 있다는 내용은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적 기준의 그런 고도의 노예제를 상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은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씨족 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본관제도가 발달한 것과 대비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물론 만주지역에서도 그런 본관제도가 발생하고 유지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 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쥬스, 케레이 이러면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본관제도와 비슷한 제도가 현재도 중앙아시아에 곳곳에 걸쳐 남아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일분의 기원을 만주 등지로 설명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 내용을 고려하면 고조선이 고강도의 노예제 사회였다는 것을 상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가야사 연구에도 노동력이 착취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역시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가야는 여러 개의 나라가 연방체로 구성되었지 고려나 조선처럼 통일된 세력권을 형성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나라가 연합한 연방체였고 연방에 소속된 여러 가야의 나라들이 제각각 그다지 큰 규모가 아니었는데 고강도 노예제를 상정하는 것이 타당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야가 철을 생산하고 기타 각종 토기나 장신구 등 공예술이나 여러 방면에서 발달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이 노예제와 같은 착취 구조를 기반으로 성장한 모습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대한민국을 홍보하는 영상 중에 여성이 새벽에 길을 걸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특정 시간대가 되면 바깔 출입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 초반에 표범이 마지막으로 잡혔다고 하는데, 야밤에 길을 다닌다고 해서 호랑이나 표범 늑대가 공격할 일 이 있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또, 고령(대가야) 쯤에 살고 있는데 금관가야(김해) 군사들이 갑자기 쳐들어오는 그런 상황을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반면, 가야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야밤에 맹수가 공격할 수도 있고 이웃한 신라나 다른 가야국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도 있었으며 백제 군사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신라에 왜가 쳐들어와 성을 공격하거나 성을 애워싸거나 했던 일이 있었다고 하므로 왜의 공격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즉, 항상 위험을 고려해야 하는 환경이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20세 무렵이 되면 대부분이 군복무를 합니다. 최근 유튜브에 D.P. 라는 드라마의 리뷰 영상이 올라와 있던데, 요즘을 사는 대한민국 청년들은 2년여의 군생활을 하지만 고대 가야나 백제 신라 또는 고구려를 살던 사람들은 맹수들의 공격, 이웃나라의 침공 등을 감안하여 평생을 군생활 하듯이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름만 되면 제초작업을 해야 하고 겨울이 되면 눈을 치워야 하고 그 외에도 갖가지 노동에 투입되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상황이 차이가 있을망정 고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 농사까지 지어야 했지 않습니까.
요즘은 트랙터, 콤바인 등등 갖은 농기계가 있어서 혼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지만, 고대 가야는 고사하고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경운기, 트랙터, 콤바인 같은 기계화 된 농기구는 없었습니다. 가야사 연구를 읽어 보면 호미도 만들었다 쇠도끼도 만들었다 뭐 그런 내용은 있지만 경운기를 만들었다. 트렉터를 만들었다 그런 내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호미 들고 밭을 메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늦봄부터 자라나는 잡초를 호미로 걷어내려면... 어이쿠 그 짓을 어찌할지. 현재의 학자들이 농촌에서 자라 호미로 밭을 메보았다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비만 한줄기 쏟아지면 야! 언제 김맸냐? 하고는 쑤욱~하고 자라는 것이 잡초입니다. 콩밭 메는 아낙네가 베적삼을 흠뻑 적신다는 노래가 나올 때에는 제초제라도 있었지만 고대 가야에 제초제가 있었을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가수 주병선이 칠갑산을 부를 무렵 대한민국 어느 곳에도 제초제가 없는 곳은 없었습니다.
전문 학자분들이 고대에는 고강도 노예제 사회였을 것이라는 전제나 추론을 하는 것을 두고 무조건 반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대와 고대의 노동 환경이나 기술기반이 다르고, 지금보다는 고대가 더욱 농업에 치중했을 것이기도 하며, 또 기계화된 장비가 전혀 없던 시기이므로 지금보다 훨씬 노동 효율이 떨어져서, 즉 더 많은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환경이었던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게다가 신라, 백제, 고구려, 왜 등 이웃에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군사적 위험과 먹을 것을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맹수들로부터의 공격 역시 항시 상존하는 형국이었기도 하고요.
쓰다보니 진짜 장문의 포스트가 되어 버렸네요. ㅡ,.ㅡ
여기까지 읽는 분이 계시려나요? 그런 분이 계시다면 전문지식 없이 지껄인 것을 읽어주신 것에 그저 송구하고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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