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단군세기 중 14세 고불 단군 시기에 호구조사를 했더니 총인구가 1억8천만호(戶) 라고 적혀 있습니다. 1호(戶)를 몇 명으로 잡느냐에 따라 개별 총 인구는 달라집니다. 즉, 1호를 5명으로 잡으면 인구가 9억이 되고 1호를 10명으로 잡으면 18억이 됩니다. 호구조사를 한 것이 BC.1666이라고 하는데 지금으로부터 무려 3600여년 전입니다. 기원전 호구조사로 1戶당 5명이라고 해도 9억이나 되는 인구가 살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라는 것을 근거로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고조선(단군조선)이 어디에 있었느냐를 두고 여러 학설이 상충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대표적으로는 아래 몇 가지 설로 고조선의 강역을 설명합니다.
1. 대동강 유역에 있었으며 한반도 밖으로 진출한 적이 없다.
2.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넓은 영역에 걸쳐 있었다.
3. 대동강 유역에 있었으나 한반도를 넘어 만주로 진출하였다가 현재의 북한 평양지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에게 전래된 우리 역사서에는 고조선의 강역을 설명하는 문헌이 거의 없고 1980년대에 와서야 환단고기에 1억8천만호(戶)라는 기록이 발견되었으므로 일개 평범한 독자로서도 긴가민가 합니다. 그러나, 환단고기를 제외하고 우리에게 전해지는 고조선에 관한 역사서가 없는 반면, 중국에서도 사기 조선열전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우리 역사를 기록했다는 것 역시 상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중국이 단군조선인지 위만조선인지 모르겠지만 조선을 언급하면서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기원전 108년 한무제 때 부터이므로 그 이전인 단군 왕검은 고사하고 고불 단군 시기인 1500여년 전에 대한 기록은 환단고기를 제외하고는 고조선을 직접 언급하는 역사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중국 역사서에서 고조선이 언급되는 최초의 서적은 관자라고 합니다. 관자에 기록된 조선은 발조선으로 나오고 인구가 얼마인지 또는 어떤 성격의 나라였는지 뭐 그런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대신 다만 유명한 산물(호피:호랑이 가죽)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어서 고조선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자료는 되지 못합니다. 그 외 상서대전에 기자에 관해 언급하면서 기자가 조선으로 갔기 때문에 기자를 조선후에 봉했다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그 시기는 기원전 1100년쯤 전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기자만 언급하지 고조선이 어떤 성격의 나라인지 인구는 얼마인지 등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한편, 중국의 전설적인 임금 우가 거듭되는 중국의 홍수를 막기 위해 회계산에서 창수사자로부터 5행치수법을 전수받았다거나 순임금이 고조선의 제후였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환단고기에는 나옵니다. 부도지에도 나오지요. 중국의 사서 오월춘추 등에서도 창수사자 등을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즉, 고조선의 영토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보통은 한반도 이내로 보는 견해와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영역으로 생각하는 경우 1억 8천만 호(戶) 9억이라는 인구는 이해가 어려운 숫자이지만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하나라 등이 만약에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다면... 그리고 우리는 고구려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돌궐 등과 동맹한 사실을 알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비파형 동검이 만주와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터키나 오스트리아 등지에서도 발굴이 된다고 합니다. 즉, 중국에서 주나라가 성립하기 이전의 하나라 등은 고조선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고조선이 조한 전쟁에서 패한 후 계보를 잇는 고구려가 돌궐과 교류가 있었다면 고조선 시기에도 교류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의외로 고조선의 영향력이 넓었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고대 중국에 있던 여러 나라들이 고조선의 속국이었다거나 뭐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고려를 이은 조선도 명나라와 형제국이라고 했던 것으로 압니다. 국가간의 관계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복속된 나라가 있고 형제라는 관계로 설명하기도 하며 동맹국이라는 관계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혹시나 위와 같은 내용을 언급하면 무슨 환빠니 뭐니 하면서 저를 욕하실지 모르겠지만, 관자에 기록된 내용이나 한무제 당시 사마천 사기에 기록된 내용으로는 실제 고조선의 강역이나 규모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므로 유물 분포를 가지고 어떤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 몇 자 끄적였습니다. 아시다시피 화하인은 농경민족이었고 중국의 변방은 대부분 유목민족이었습니다. 고조선 부여의 맥을 이은 고구려도 말을 잘 타던 나라였지요. 고구려는 특정 영역을 지키는 나라였지만 여타의 유목민족은 말을 타고 다녔고 유목 생활 때문에 이동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고대 중국인의 관점보다는 유목민들의 시야가 훨씬 넓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영상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우리는 비파형 동검을 고조선 표지 유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비파형 동검은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발굴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이 터키나 오스트리아 지역에서도 발견이 되고 고구려가 돌궐과 교류가 있는 등의 연고를 고려하면, 어쩌면 고조선의 강역은 만주나 한반도를 넘는 영역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와 같은 정치체제나 행정체제가 고대에도 시행되고 있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환단고기를 읽어보면 단군께서 순수(巡狩)를 다니시면서 언어와 관습을 통일시켰다거나 하는 그런 설명이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의 황제들도 순수를 다녔다는 기록이 있는데, 중국과 달리 고조선이나 고구려는 유목하는 여러 종족들과 관계가 있었으므로 요즘처럼 무슨 도 무슨 시 무슨 구 무슨 동 과 같이 특정 지번을 콕 찍어서 거주지를 정하지는 않지만 어떤 지역을 기준으로 얼마나 떨어진 거리에 터를 잡았습니다! 하는 그 정도의 소통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유목민의 특성상 말이나 양 등 가축 등을 몰고 멀리 이주했을 그런 가능성과 함께 생각하면 의외로 1억 8천만호 라는 인구는 만주와 한반도에 거주했던 인구만을 가리킨 것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미국에 유학을 간다거나 아니면 유럽 여행을 간다거나 하면 요즘 같은 시대에는 "야 너 지금 어디야! 좌표 찍어봐!" 라고 하면 동경 XXX 북위 XXX 하면서 곧바로 위치 표시됩니다. 그러나 그런 기술을 일반 개인이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30년도 채 되지 않으며, 군사기관 등에서도 아마 100년은 절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최초로 인공위성 띄운지 100년 안되잖아요. 즉,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이전에는 누가 어디를 여행을 하던지 이주를 하는 경우 대략적인 방향만을 알지 구체적인 위치를 유목민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특칭할 수 없는 시대였다는 뜻입니다.
한편, 단군 외에 카자흐스탄이나 흉노 등에 관한 여러 이야기 - 김정민 박사,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 참고 - 등을 보면 우리가 단군이라고 부르는 분을 그들은 탱그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즉, 고대의 고조선 사회가 씨족을 단위로 움직였는지 아니면 부족을 단위로 움직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옮겨다니는 방향에 따른 대략적인 위치 확인을 위한 정도의 소통은 분명히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조선의 영역이나 강역에 관해 생각할 때, 만주와 한반도 일대다 또는 한반도 이내이다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현대의 영토 개념을 접목시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위토문 서위압록이라고 적혀 있다는 백두산 정계비에 관한 이야기를 압니다.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시기가 숙종 임금님 때인지 아니면... 잘 모르겠어요. ㅡ,,ㅡ 어쨌거나 산이나 강을 국경으로 삼은 것이 누 천년 역사에 비한다면 불과 몇 백년 전까지도 그런 기준으로 국경을 정하고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고대의 유목민들이 강을 경계로 나누어 살면서 매일 강가에 붙어서서 건너편 족속이 넘어오나 안 넘어오나 뜬눈으로 밤을 새며 지키고 있었을까요? 지금처럼 인구가 조밀하고 경계를 분명히 하려는 의식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를 가정해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결론은,
지금으로부터 3600여년 전 인구가 호(戶)당 5명이라고 해도 9억이라는 인구를 납득하기 어렵다.
현재의 국경 개념으로 고대 유목민들의 영역 개념을 재단하는 것 역시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고조선이 만주나 한반도에서 성립하고 성장한 국가라는 생각은 현대적 국가 개념일 수 있다.
흉노, 몽골 등 북방 여러 유목민들이 고조선과 유대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은 특정한 지역에서 성립한 왕조라고 보는 것 역시 착각일 수 있다.
오히려 고조선은 북방 여러 유목민족들의 랜드마크 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기원전 3600여년 전 고조선 인구가 1억 8천만호라는 것은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거주한 주민들의 숫자가 아니라 고조선을 랜드마크로 삼았던 여러 유목민족과 고조선과 관계가 깊었던 나라들 모두의 인구일 수 있다.
좀 황당하지요? ㅡ,.ㅡ
중국사를 기준으로 하면 흉노가 중국을 쳐들어오고 견융이 쳐들어 오고 뭐 그랬다는데, 그런 개별 부족들까지 고조선이 모두 통제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중국 입장에서는 오늘은 이 오랑캐가 쳐들어오고 그제는 저 오랑캐가 쳐들어오고 뭐 그랬다면서 적은 것이 중국 고대사가 아니었느냐!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한편,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 연구소장이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라는 책을 냈는데, 제목을 보면 현대의 또는 약간 소급해서 제국주의적 팽창의 시기의 어느 한 제국처럼 그렇게 대륙을 지배했다고 저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 보다는 고조선인들은 대륙 곳곳에서 살던 거주자였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고조선이 좀 특수한 관계로 유목민들의 랜드마크(Landmark)가 아니었나! 뭐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황당한 이야기지만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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