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를 중국 역사로 포함시키려 중국이 무진 애를 쓰고 있다는 것 아시지요? 발해 뿐만 아니라 고구려도 그렇기는 하지만 중국이 발해 유적을 발굴해 놓고는 한국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발해 황궁을 중국 장안성을 본떠서 지었다는 망설을 지어내기도 했다네요. 하지만 발해 궁전의 규모는 19간이고 장안성의 궁전의 규모는 11간이라네요. 발해가 옛날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하면서 지방정권의 궁전이 더 크다니 우습지 않나요? 죽, 발해는 중국과는 아무 상관없는 우리 고유의 역사라는 말이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rghmx1y6jqE
고작 궁전 크기로 지방정권이냐 아니냐? 뭐 그런 것을 따지느냐며 이의를 제기하실 수 있으나, 옛날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중국의 신분이나 계급체계가
황제 왕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상대부 중대부 하대부 상사 중사 하사
뭐 그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집이든지 마차든지 옷이든지 모자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황제의 것이 가장 크거나 화려하답니다. 우리나라에도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신하 이하 일반 백성들은 99칸 이상의 집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집을 여러 채 가진 것이 아니라 한 채의 규모가 아무리 커도 99칸을 넘을 수 없었지요. 그 외 당상관 당하관 참상관 등에 따라 관복의 색깔도 다르지요? 붉은 색 푸른 색 등으로... 그렇게 유교의 예에 따르면 신분이나 계급에 따라 모든 것이 정해진 규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발해의 황궁이 중국 장안성 규모보다 더 컸다는 것은 발해가 당나라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독자적인 왕조였음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삼국사기 어느 편에 발해를 북국(北國)이라고 표시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리고 발행의 승를 고구려의 승려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고구려가 망한지 이미 150년이 지난 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는데 망한지 150년이나 지났는데도 북국(北國)인 발해에서 온 승려를 고구려의 승려라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발해를 발해가 아니라 대진고려 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고구려는 다른 말로 구려 또는 고려라고도 불리었기 때문입니다. 즉, 발해는 고려 또는 고구려였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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