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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향당 문마(問馬)

참그놈 2022. 5. 18. 07:43

논어 향당 편에 마굿간에 불이 나는 사건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공자가 그 말을 듣고

 

傷人乎 (사람이 다쳤는가?)

 

라고 정황을 확인했다는 내용입니다. 원문은

傷人乎不問馬(상인호불문마)

입니다. 문제는 한문에는 띄어쓰기가 없다는 것 아시지요? 위 구를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상황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傷人乎, 不問馬(사람이 다쳤는지 묻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傷人乎不, 問馬(사람이 다쳤는지 아닌지 묻고 말에 대해서 물었다)

 

어느 해석이 맞을까요? 고작 한문 구절 하나를 두고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옛날에는 목숨이 오락가락 할 수 있는 문제였답니다.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첫번째로 해석하면 문제가 안되는데 두 번째로 해석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말이거든요.

 

You are welcome. (천만에요)

You are welcome. (당신이 welcome씨이시군요)

 

서양 사람들 이름에 Welcome이 없으리라는 법 없지요? 하지만, 위 예를 조선왕조의 주자 성리학에 빗댄다면 두 번째로 해석하면 죽는 겁니다. 실제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은 선비들도 적지 않지요.

 

조선왕조에서는

傷人乎, 不問馬(사람이 다쳤는지 묻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외에 다른 말을 하면 그냥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서 죽임을 당했거든요. 박세당이나 윤휴 같은 선비들이 2번 처럼 해석했는데, 박세당에 대해서는 모르겠고 윤휴는 죽었답니다. 주자가 어떻게 해석을 했느냐면, (마굿간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고) 공자께서 "사람이 상했는가?' 하시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고 하여 공자가 재난을 만났을 때 사람만을  중시하고 재산 따위는 관심도 나타내지 않음으로써 성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의 표상(表象)이었거든요. 표상(表象)...

 

한일 합방당시 찬성여부를 묻는 문서에 김윤식이

不可不可

라고 썼다는데, 하필 한문에는 띄어쓰기 없다고 했지요? 위 구절을

不可, 不可

不可不, 可

 

로 어떻게 띄워읽느냐에 따라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진답니다. 불가, 불가로 읽으면 절대 반대의 의미이고... 불가불, 가로 읽으면 어쩔수 없이 찬성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되지요. 한문이라는 것이...ㅡ,.ㅡ   그러므로 한문의 표점이라고 해야 할지? 또 주석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것이 중요하기도 할 것인데, 중국에서는 숱하게 전란이 생기고 그래서 한문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고 하기 힘든 시절도 있지요?

 

논어 술이편을 보면 술이부작(述而不作)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직 해석할 뿐 새로 짓지 않는다는 것인데, 한문의 권위는 아마 그런데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긴 합니다. 원래 한문(漢文)은 아무나 읽고 쓰는 글자가 아니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꿈보다 해몽이라고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데, 오직 하나의 해석만을 고집할 때, 그것은 述而不作 보다 못한 결과가 나기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사실 주자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한학을 한 것이 아니라서 한학을 도통 모르긴 하지만, 백골징포, 황구첨정, 애절양 같은 시가 전해지던 시기가 주자 성리학을 추종하던 조선왕조였기 때문입니다. 삼정(三政)의 문란도 있지요? 모래를 쌀에다 섞었다는... 주자가 그렇게 가르쳤다는 말 이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편견이나 선입견이라면 좀 심한 것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평생을 대학(大學)을 읽고 그 차서를 복원하려 한 학자적 노력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것을 보면 중국이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백골징포하고 황구첨정 하라고 가르쳤을 것 같지는 않은데, 희안하게 조선왕조의 역사에는 그런 역사적 사실들이 나타났잖아요. 그러나, 주자가 그렇게 가르치려 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조선의 진정한 선비들도 백골징포나 황구첨정 등을 부정했으리라 추측합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내용들을 보고 나니까 주자도 조선의 사대부들도 이상하게 생각되더라고요. 물론 조선의 선비들에 대한 미담도 많습니다. 하지만 현실정치에서는 백골징포나 황구첨정이 있었으므로 그런 관행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것인지

 

대출 많이 받은 거지는 오랑캐...?

 

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 보다는 대출을 받게 해서 거지로 만든 다음 금융노예로 만들려는 것일까요? 예기 예운(禮運)편인가 대동(大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오랑캐만 알고 대동(大同)은 몰랐다는 것인지...

 

 

이 포스트는 일부 수정되었습니다. 제가 읽은 대학은 주석이 모두 있는 것이었는데, 책을 읽다

여성은 교화되기 어렵거나 힘들다

는 그런 내용도 있고 그래서 이해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1000년 전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니 그걸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내용을 제외하면 사대부가 해야 할 수양이라거나 직분에 충실하라거하는 내용이니 백골징포나 황구첨정 같은 가렴주구를 말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역사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렴주구의 모습이 있었다는 것 때문인지, 그리고 조선왕조가 오로지 주자 성리학만을 추종했다는 것이 비루한 저 자신의 이해에 상충했는지 주자 이러면 일단 그냥 그닥 긍정적으로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경우에 따라 육두문자 같은 욕도 하고 그랬습니다.

 

실은 이 포스트가 수정되기 전에도 역대급 가계부채와 여러 경제 평론가들이 금융노예라는 말도 하고 그러는데,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사서(四書)가 권장도서에서 빠지지 않는다는 것 등이 범벅으로 머리 속에서 뒤엉키면서 또 주자와 사대부들을 욕했거든요. 하지만, 대학 주자장구 서문을 보시면 주자 자신이 평생 대학의 차서를 밝히려 애썼지만 맞게 했는지 자신이 없다며 후학들의 참여를 바란다고 썼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사대부들이 모두 가렴주구만 일삼았던 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비루하고 천박한 것이 이럴 때 드러나는가 봅니다.

 

한문은 어떻게 끊어읽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데, 주자가 한 해석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런 관행이 여전히 통하는 것인지... 대학장구 서문에 주자 스스로 평생을 매진했지만 자신이 없다고 밝혔다고 썼지요. 학문에는 진심이었나 봅니다. 그런 분이 논어나 기타 나머지 경전에 대한 해석에도 아마 대학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후학들의 참여를 바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