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朝鮮史 :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조선사(조선상고사) 읽기 9 - '침략'이라는 단어가 또 나온다.

참그놈 2022. 6. 2. 08:43

비봉출판사 박기봉 역 조선사(조선상고사) P.137에

 

침략주의적 성격을 지녔던 역대 제왕(帝王)들의 칼끝에서 빛나던 조선(朝鮮)이란 명사는...

 

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해당 부분까지 읽고 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사(조선상고사)에 '침략'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은 고대사를 연구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는데, 단재 선생 당시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겠지요? 물론, 책의 앞에서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나 이종휘의 수산집이나, 한치윤의 해동역사 등을 설명하면서 장단점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연구가 활발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고대사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하는 고대역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그 외에 규원사화나 제왕운기 등이 있지만 부족한 사료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조한 전쟁(고조선 VS 중국 한漢나라)으로부터 시작되는 투쟁의 과정이 대부분입니다. 게다가 단재 선생 자신도 국권을 상실했다는 사실로 인해 중국에서 생활을 하셔야 했지 않습니까. '침략'이라는 단어는 그런 까닭으로 단재 선생의 조선사에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되네요. 제국주의 열강의 시대가 무력을 앞세운 시기였으므로 조한전쟁 이후의 역사 대부분을 무력침략의 역사, 즉, 투쟁의 역사로 파악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러나, 100여년 후의 역사학도도 아닌 평범한 서민에 불과하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의 주장은 억설이라고 생각되네요. 나름으로 근거를 대 본다면...

 

 

1. 금간옥첩으로 치수법을 알려주었다.

 

서경이나 오월춘추에 기록이 있다는데 원문은 잘 모르겠고, 중국에 9년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부루가 창수사자로 가서 오행치수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침략을 선호했다면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고 땅을 차지하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침략적 사고를 가졌다면 할 수 없는 일 아닐까요?

 

현대는 자본주의 사회고 화폐경제 사회라 더 많은 화폐와 권리를 가진 사람이 부유하게(?) 삽니다. 농경이나 수렵을 하던 고대에는 땅이 곧 자본이었지요. 어쩌다 우리의 역사가 전해지는 것이 턱없이 부족해 고대사의 면모를 볼 수 없어서 억단을 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2. 단군사화(檀君史話)

 

단재 선생은 무정부주의자였습니다. 독립 투쟁을 위해 무정부주의 노선을 택한 것으로 이해 되는데, 조선사(조선상고사)를 읽어 보면 단재 선생은 무정부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3경 5부제도 등을 설명하면서 단군이 만든 전설이라거나 하는 내용이 있으니까요. 서구의 선교사들이 한민족(韓民族)에게는 유일신 사상이 있었다는 내용은 일단 제쳐두고, 단군사화에는 곰과 호랑이가 나옵니다. 둘 다 맹수입니다. 곰은 개과고 호랑이는 고양이인데, 개는 사람과 잘 어울려 삽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자기 영역을 지킵니다.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고 햇빛을 보지 말라는 부부이 나오는데, 이는 수련과정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가 됩니다. 곰이나 호랑이가 둘 다 맹수라면 그 용력(勇力) 또한 대단했을 것인데, 힘센 사람이 힘을 함부로 쓰면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즉, 수련 과정을 거쳐 힘을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뜻에 맞게 힘을 쓰도록 수련하고 수양에 성공한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가 나뉘는 기준이 되겠지요. 곰과 호랑이가 한 굴에 살았다 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는 곰과 호랑이가 각각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수련의 결과에 따라 그 양상이 나뉘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게다가 곰은 해마다 겨울잠을 잡니다. 해마다 수련을 한다는 뜻일 수도 있고요. 홍익인간을 위해서...

 

그런 내용으로 짐작하는 경우 단군 조선의 가까이에서 거수국으로 있었던 나라들은 그 만한 교육체계나 수련체계가 있었다는 말이 되고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족속들은 변방에서 유목민으로 살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3. 농경과 유목 사이 그리고 만리장성

 

서경을 읽어 보면 요임금이 희씨나 여러 신하들에게 천문 관측을 하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본격적인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다는 뜻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요나 순임금 때에는 만리장성 같은 것은 없었고, 고대의 생산력은 지금에 훨씬 미치지 못하던 때입니다. 그리하여 호랑이 같은 변방의 유목민들이 농경을 위주로 하는 중국을 자주 침략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나라가 건국되고 춘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유목민들을 방어하기 위한 장성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겠지요.  반면, 주나라 역사에 대해 기록한 책에서 숙신이나 한후(韓后) 등을 언급하며 교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흉노나 몽골 등이 조선에서 분파해 나간 종족이라고 해도 그들은 곰처럼 겨울잠(수련, 수양)을 자거나 하지는 않는 족속들이었지요. 중국 역사에서 유목민들의 침략을 자주 당했지만 단군 조선과는 침략 방어의 관계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공격을 당하다 진나라 때 대충의 만리장성이 완성되고 한 무제에게 흉노는 패합니다. 그리하여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해 가는데, 동쪽으로 이동해 오지 않습니다. 곰도 맹수거든요. 그 만한 무력을 고조선의 거수국들이 그 만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가락이나 신라가 김일제의 후손이라거나 하는 내용이 있는데, 거친 유목민들은 서쪽으로 이동해갔고 진한의 유민들 중 조선족의 분파였던 일부는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4. 투쟁의 시대...

 

조한전쟁으로 본격적인 혼란기로 접어듭니다. 단재 선생이 사기 조선열전을 인용하면서 한 무제가 고조선을 이긴 것이 아니다 라는 주장을 하시는데, 어쨌거나 그로 인해 동아시아는 일본을 제외하고 중국 대륙이나 만주 한반도에 거대한 변화가 생깁니다. 고조선의 서쪽 변방이 한나라와의 전쟁을 겪으면서 삼조선 체제로 운영되던 고조선의 70여 거수국들이 서로 투쟁하는 시기가 시작된 것이지요.

 

고조선은 곰(수련과정이나 교육체계를 거치는) 나라들의 구심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조한전쟁으로 그 구심점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역사 드라마를 보시면 왕권 경쟁 때문에 왕자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그런 내용이 많지 않습니까. 동양이 아니더라도 왕좌의 게임(The Game of Throne) 같은 서구 드라마도 마찬가지잖아요. 합종연횡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도 다 그런 것이고, 삼국연의에도 온갖 장수와 모사들이 등장하고요. 즉, 조한전쟁으로 인해 동아시아 대부분이 거대한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고, 하필 우리의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는 까닭에, 문화사든, 학술사든, 종교사든... 그리하여 단재 선생께서도 투쟁의 역사로 밖에 파악할 수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조선사(조선상고사)에 국선오계(國仙五戒)를 소개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한민족의 고대 제왕들이 침략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억단을 하신 것은 제국주의 열강의 시대를 사신데다 나라가 일본에 강제병합되는 통한을 겪으셔서 그렇게 생각하신듯 합니다. 가령, 국선오계를 설명하는 대목에 국선(國仙) 구산과 주막집 주인의 대화가 나오는데, 국선이면 나라 전체에서의 위상이 대단했겠지요? 그런데 고작 주막이나 하는 사람이 그런 국선(國仙) 구산을 꾸짖습니다. 주막집 주인이라면 하층민이었을 것입니다. 하층민들 조차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은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 몰랐을까요. 그런 풍속을 유지하고 있던 우리 선조들을 침략주의적 성향을 가졌다고 평가하기보다 아시아 전체가 난세였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덧붙여 일본이 조선사(조선상고사)를 검열했다고 하는데, 책을 읽어 보면 일제의 검열을 당해 삭제된 곳이 2곳 나옵니다. 巨X 라고 한 곳과 2줄 생략된 부분인데, 이후에도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런 것을 보면 단재 선생의 조선사 연재가 일제(일본 제국주의)의 검열을 거의 무사통과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는 단재 선생의 조선사(조선상고사)가 대체로 치고박고 싸우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왕조처럼 예와 악을 숭상하고 시와 서를 생활화 하는 문필로 가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추측이 되네요. 국선(國仙) 구산의 경우를 일본에 빚대어 보면 주막집 주이이 살아 있을까요? 빠가야로 이러며서 목을 쳤겠지요? 그것이 아마 한민족(韓民族)과 일본인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귀가 있어도 못알아 듣는 귀라고 할까요? 칼이 잘 드나 안 드나 시험하려고 아내를 베었다는 사람들이에요. 길거리에서 무사(사무라이)가 아무나 칼로 죽일 수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귀가 있다고 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삼국연의가 왜 일본에서 그렇게 유행하겠어요. 치고 박고 싸우다 죽고 죽이는 이야기들이라서 그렇답니다. 삼국지 100년 도감이라는 책 서문을 보면 그걸 인간의 본성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답니다. 코흘리개부터 80노인까지 모두가 보는 책에... 속고 속이고 죽이고 죽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니... ㅡ,.ㅡ

 

어쨌거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사(조선상고사)를 읽는 분이 계시다면, 단재 선생의 과격함에는 시대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고 보시길 바랍니다. 국선(國仙) 구산을 꾸짖은 주막주인이 있었고 국선(國仙) 구산은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다는 그런 내용을 놓치지 말으셔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