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원문/논어

논어 읽기 3 : 세주완역 논어집주대전 P.18~20

참그놈 2022. 6. 6. 12:59

세주완역 논어집주대전 P.18 하단부터 한문 원문을 복사했습니다. 

 

乃入道之門, 積德之基, 學者之先務也. 凡十六章

 

내(乃)자가 이해하기 힘든데, 옥편이나 자전에는 '이에 내'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2인칭 대명사로도 쓰인다네요. '이에' 라는 설명을 보고 乃가 어떤 뜻인지 짐작이 되시나요? 옥편이나 자전에서 설명하는 것 외에 그 뜻이 뭘지 내(乃)자를 보면 생각을 해 보지만, 여전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첫번째 집주와 연결하면

 

此爲書之首篇故, 所記, 多務本之意乃入道之門, 積德之基, 學者之先務也. 凡十六章

 

이 되는데, 간혹 옛날 책들을 사진으로 찍은 책들을 보면 옛날 사람들은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책을 그렇게 편집했을까? 읽다가 허패뒤집히지 않았을까?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글이 있고 한자는 한자 한 글자 한 글자마다 각각의 의미가 있으므로 그 만큼 신중하게 읽고 생각했나보다 라는 것을 나중에 이해는 하게 되었습니다. 

 

 

위 문장에 도덕(道德)이 나오는데, 도덕(道德) 이라고 하면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연상하는 것이 보통 아닌가요? 사실 한문 고전에 대해서 전혀 모를 때, 저는 사서오경 같은 유가 경전에는 도덕(道德)이라는 말은 안나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공자의 사상을 한 글자로 인(仁)이라고 하고 맹자의 사상은 인의(仁義)라고 하고, 유가에서는 주로 인의예지신을 말하니까 도덕(道德)이라는 것은 노자에서나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요. 참 무지하고 무지하지요? 뭐 지금도 그렇지만...

 

어쨌거나 유가 경전에서도 도덕(道德)이라는 구가 종종 나오는 것 같던데, 도(道)나 덕(德)이라는 개념을 노자와는 해석을 다르게 하나 봅니다. 다른 제자서는 읽어 본 적이 없어서 더더욱 모르는데, 아마 제자백가 다른 곳에서도 도(道)나 덕(德)이라는 개념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도(道)나 덕(德)이 제자백가로 이름지어진 숱한 사상가들에게 인의예지신 같은 개념보다 더 핵심적인 가치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지만, 저 자신이 제자백가를 모릅니다. ㅡ,.ㅡ  어쨌거나 살면서 유가와 도가에서 생각하는 도(道)나 덕(德)이라는 개념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해 주는 그런 내용은 못 본 것 같기도 하네요.

 

慶源輔氏曰, 道者人之所共由必有所從入, 德雖在我之所自得必積而後成. 凡此篇所論, 務本之事乃道所從入之門, 而德所積累之基. 學者必先務此. 然後道可入而德可積矣.

 

경원 보씨가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道者人之所共由 라는 구를 저는 "도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다"로 이해가 되네네요. 德雖在我之所自得 에서 보면 '덕(德)은 스스로 얻는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러분 혹시 덕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ㅡ,.ㅡ 좀 황당한 질문일가요?

 

옥편이나 자전에서 덕(德)이라는 글자의 뜻을 찾아보면 하나같이

덕 덕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뭐냐? 나무. 식물이 뭐냐? 식물. 바람이 뭐냐? 바람...

욕나오더라고요. 씨팔이라고... ㅡ,.ㅡ

하루 이틀 뒤진 게 아니거든요. 가지고 있는 옥편이랑 자전이 한 10권 정도 됩니다. 뭘 봐도

덕 덕

그렇게 몇 년을 해메다가 어느 책을 보니까 - 몇 년 동안 덕(德)이라는 글자의 뜻만 찾아헤맸다는 말이 아닌 것은 아시지요?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어쨌거나 제가 봤던 어떤 책에서

도(道)는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고 덕(德)은 도(道)를 행하는(실천하는) 것이다

 

라는 설명을 보게 됩니다. 젠장...또 욕나오려고 해서 생략... 여전히 덕 덕으로 설명하면서 인쇄해서 팔고 있겠지요? 

 

 

○朱子曰, 學而篇名也. 取篇首兩字爲別初無意義. 但學之爲義, 則讀此書者不可以不先講也. 夫學也者, 以字義言之, 則已之未知未能而效夫知之能之之謂也. 以事理言之, 則凡未至而求至者皆謂之學. 雖稼圃射御之微, 亦曰, 學配其事而名之也, 而此獨專之則所謂學者果何學也. 盖始乎爲士者所以學而至乎聖人之事. 伊川先生所謂儒者之學是也. 盖伊川先生之意曰, 今之學者有三, 詞章之學也, 訓誥之學也, 儒者之學也, 欲通道則舍儒者之學, 不可尹侍講所謂學者所以學爲人也. 學而至於聖人亦不過盡爲人之道而已. 此皆切要之言也. 夫子之所志, 顔子之所學, 子思孟子之所傳, 盡在此書而此篇所明, 又學之本故, 學者不可以不盡心焉.

 

 

學而篇名也. 取篇首兩字爲別初無意義.

주자는 학이(學而) 라는 편명에는 별 뜻이 없다고 해설하는데, 제 생각은 다르다고 이전 포스트에 써 둔 것 있습니다.

 

欲通道則舍儒者之學, 不可尹侍講所謂學者所以學爲人也. 學而至於聖人亦不過盡爲人之道而已.

사람이 배워서 성인이 되려는 것도 사람의 도리를 다 하기 위한 것이다 라는 해석은 송나라가 송나라의 안전을 위해서 요나라 등에 해마다 세폐를 바쳤다고 하더라고요. 속된 말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보는 것처럼 조폭들에게 세금을 바쳤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 될런지, 어딘가에 커다란 지출항목이 생기면 무리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할 때, 주자가 살던 송나라 상황을 모르기는 하는데, 그 만큼 당시의 풍속이 건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말일 수도 있고 뭐 그렇게 이해가 되네요. 반면, 현대 민주주의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적용이 되는 말일까요? 위 구절에 대한 이해나 해석은 송나라 당시의 사회 풍속이나 현대의 사회풍속을 비교해 봐야 이해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네요.

 

夫子之所志, 顔子之所學, 子思孟子之所傳

 

공자의 유세는 당대에 성공하지 모했습니다. 안자는 굶어죽었지요. 자사는 모르겠고 맹자 역시 양혜왕 제선왕을 만나고 그러지만 어쨌거나 성공하지 못합니다. 주자가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앙받을 것을 주자 자신이 알았을까요? 그런 것을 보면 주자가 학문에 진심이고 매우 진지하게 살다 간 인물인 것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으로 이해가 됩니다. 조선왕조에서는 주자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뭐 그런 시절이 있었지 않습니까. 반면, 애절양이라는 시가 지어지기도 했지요.

 

다산이 목민심서를 쓰고 뭐 그러는 일이 있었는데, 조선의 사대부들이 모두 타락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의 유성룡이나 남명 조식 같은 선비들 외에도 우국충정의 인사들도 많았을 것이지만, 어쨌거나 조선왕조의 역사에 애절양이나 황구첨정, 백골징포 같은 문자(文字)가 남아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사람이 되는 길을 혼심의 힘을 다해 밝혀놔도 누군가는 사리사욕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일까요? ㅡ,.ㅡ

 

 

○今讀論語, 且熟讀學而一篇, 若明得一篇, 其餘自然易曉.

 

위 해설에 대해서는 라는 글자 하나만 이해하면 되지 싶네요. 라는 글자는 '또' 라는 뜻이 있지만, 도마 라는 뜻도 있고 공경한다는 뜻도 있네요. 그 만큼 학이(學而) 편을 중시했다는 뜻이겠지요? 도마에 아무거나 올립니까. 먹을 것을 올리지... 여러 가지 기호식품들이 있지만 밥은 꼭 먹어야지요? 한글로 의 뜻을 를 "또"라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곤란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학이(學而)편은 매번 논어라는 책을 펼 때마다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편이라는 뜻이겠지요.

 

○學而篇皆是先言, 自脩而後親師友, 有朋自遠方來在時習之後而親仁在入孝出弟之後就有道而正焉在食無求飽居無求安之後毋友不如己者在不重則不威之後今人都不去自修只是專靠師友說話.

 

위 구절이 찍힌 구둣점은 제가 찍었는데, 세주완역 논어집주대전과 차이가 있습니다. 세주완역 논어집주대전에서는 아래와 같이 표시했습니다. 같은 크기로 쓰려니 구분이 잘 가지 않아서 폰트를 크게 하고 띄어쓰기 표시를 하기 위해서 ○을 곳곳에 끼워넣었습니다. 

○學而篇皆是先言自脩而後親師友有朋自遠方來在時習之後而親仁在入孝出弟之後就有道而正焉在食無求飽居無求安之後毋友不如己者在不重則不威之後今人都不去自修只是專靠師友說話.

그리고 위 단락을 책(세주완연 논어집주대전)에서는

 

학이편은 모두 먼저 스스로 닦을 것을 말한 연후에 스승이나 벗과 친할 것.....

 

이라고 적었네요. 위 원문에 ○로 구분한 띄어쓰기와 부합하는 해석이지요? 하지만, 뭣도 모르는 제가 봤을 때는 어구의 구분이 잘못된 것으로 이해가 되네요. 큰 글씨 위에 제가 구두점을 찍은 것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나 이 포스트를 보시는 분들을 위해 아래에 다시 복사해 넣었습니다.

 

○學而篇皆是先言, 自脩而後親師友, 有朋自遠方來時習之後, 而親仁入孝出弟之後, 就有道而正焉食無求飽居無求安之後, 毋友不如己者不重則不威之後, 今人都不去自修, 只是專靠師友說話.

 

한문의 구조를 모르지만 재(在)자가 곳곳에 있는 것을 기준으로 저는 위와 같이 끊었습니다. 즉,

 

自脩而後親師友.

有朋自遠方來時習之後, 而親仁入孝出弟之後, 就有道而正焉食無求飽居無求安之後, 毋友不如己者不重則不威之後

 

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성리학의 시대가 아니라서 사문난적 뭐 그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책에서 표시한 구분, 즉, 아래와 같은 구분이 우리 사회의 전통적 해석인지 모르겠는데 -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사문난적으로 몰려서 진작에 뒤졌으려나... ㅡ,.ㅡ

 

○學而篇皆是先言自脩而後親師友有朋自遠方來在時習之後而親仁在入孝出弟之後就有道而正焉在食無求飽居無求安之後毋友不如己者在不重則不威之後今人都不去自修只是專靠師友說話. (기존의 어구 구분?)

 

○學而篇皆是先言, 自脩而後親師友, 有朋自遠方來時習之後, 而親仁入孝出弟之後, 就有道而正焉食無求飽居無求安之後, 毋友不如己者不重則不威之後, 今人都不去自修, 只是專靠師友說話.(블로그 주인이 생각하는 어구 구분)

 

親師友(General)

朋自遠方來, 親仁, 就有道而正焉, 毋友不如己者(Specific)

으로 이해가 되네요.

 

 

근대화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한문 해석에 자율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게 생각되는 것이, 시중에 나오는 사서(四書)든 뭐든 유가 경전은 대부분 주자가 작성한 것을 기준으로 출판되고 있거든요. 주자 성리학적 관점으로만 해설이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서두의 마지막 주석인데,

 

○覺軒蔡氏曰, 學而名篇專以學言, 而所謂學者果何所學耶. 朱子首發明學之本, 惟在全其本性之善而已.

 

發明學之本

 

에서 대학지도 재명명덕(한자 생략)을 연상해 보시고. 

 

惟在全其本性之善而已.

 

에서 복기성초(復其性初)들 연상해 보시면 될 듯합니다.

 

 

 

한문도 모르고 고전도 모르면서 이런 포스트 쓰려니 쉽지 않네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