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원문/천자문

해동천자문 014. 기려쾌렵 뢰경오곡(騎驪快獵 耒耕五穀)

참그놈 2023. 3. 22. 21:08

해동 천자문 열 네번째 구입니다. 말타고 사냥도 하고 오곡을 경작했다고 적혀 있네요.

 

騎驪快獵 耒耕五穀

 

역사 관련 서적을 꾸준히 읽거나 하지 않아서 그런지 갑자기 말문이 탁 막히네요. 어쩌다 우리나라 역사를 대강이라도 알아야겠다고 책 몇 권 샀더니 땅따먹기 하는 내용이 많기도 하고... ㅋ  지금도 땅따먹기는 계속 하고 있다나 보더라고요. 해동 천자문 다른 포스트에도 썼지만 가야사 특별전 전시하면서 일본서기로 설명하는 내용을 붙이고 그랬다지 않습니까. 옛날처럼 창이나 칼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지식으로 땅따먹기를 한다는 것이 다르지요. 누군가 2019년에 개최된 가야 특별전을 보고 일본서기를 인용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면 일반 서민들이 그런 내용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잖습니까. 문제는 우리 국사교과서는 그런 것을 안가르친다는 것이지요. 국사교과서에서는 안가르치고 사회에 나가서 가야사 특별전 한다고 해서 갔더니 배우지도 않은 난데없이 가야사를 설명하는...

 

아래는 무용총에 그려져 있다는 수렵도입니다. 사슴도 있고 호랑이도 있는 것 같네요. 그 보다는 산(山)을 작게 그린 것이 돋보이는 듯합니다. 이는 고구리(고구려 : 고구리라고 해야 한답니다)를 살던 우리 선조들이 그 만큼 산이고 들이고를 가리지 않고 말을 타고 활달하게 누볐다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산이 작다고 할 만큼... 

 

 

 

백두산이 지금은 높이가 2750미터 정도라는데, 940년 경에 백두산이 분화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구리 당시에는 더욱 높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책을 보다 보니 백두산의 옛날 높이는 3900미터 정도였다고 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지금보다는 백두산이 훨씬 높고 울창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산을 작다고 할 만큼 누비고 다녔으니 어쩌면 수양제의 130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유학(儒學)이 도입되면서 점점 수렵이나 무예보다는 농사에 보다 집중하게 되는지, 고려 성종인가? 거란이 3번 쳐들어오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강한찬(강감찬) 장군이나 서희의 이야기가 나오는... 그 무렵부터 국세가 더욱 오그라들었다고 해야할지...  조한전쟁을 시작으로 고구리가 당나라에게 패하면서 꺾이기 시작했다가 유학을 숭상하고 나서부터는 오로지 문무 양자 중 문에 치중하지 않습니까. 중용에 박학지 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하라면서 나오는데, 혀가 마르고 닳도록 소학만 주구장창 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뭐 그렇기도 하더라고요. 그래가지고서는 "남한산성"이라는 영화에는 무당에게 길일을 받아 출전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요. ㅡ,.ㅡ

 

 

벼농사가 세계 최초로 시작된 곳이 우리나라라고 하는 것 같던데, 소로리 라는 곳에서 아주 오래된 볍씨가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고대에는 쌀농사가 있기는 했어도 지금처럼 보편화되지는 또 않았다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보다는 보리나 기장 등을 많이 먹었다고 하는 것도 같고...  아니면, 오곡이 대표곡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쌀이나 보리 등이 종류가 여럿이지 않습니까. 콩도...

 

고대로 올라갈수록 농경보다는 수렵이나 채집이 위주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때부터 농사가 시작되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더라도 사냥은 계속되다가 농사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농경을 보다 중시하게 되는... 그러고 보면 기려쾌렵 뢰경오곡(騎驪快獵 耒耕五穀)이라는 구가 매우 대조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는 듯합니다. 주흥사 천자문에 광원면막 암수묘명 구 다음 구로 치본어농 무자가색이라고 나오거든요. 농사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다는 내용이지 않겠습니까. 양 문제 때면 오호십육국시대인데, 지금으로부터 약 1500여년 전에 온 천지가 농사를 짓게되었다는 그런 내용일 수도 있지요. 요즘 우리나라의 경우는 농사가 예전보다 줄었는지 모르겠네요. 지방행정구역이 소멸될 지경이라니 그럼에도 기계의 도입으로 농업 규모는 유지되고 있으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