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대사에 대해서 논쟁이 되는 여러 항목들이 있는데, 요동의 위치나, 패수의 위치, 낙랑군의 위치 등이 그렇다고 합니다. 또한, 그 중에 하나가 갈석산의 위치라고도 합니다. 갈석산은 현재 북경 동쪽에 위치한 창려현 북쪽 노룡현 남쪽 이라는 설과 하북성 보정시 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하는데, 황해도 설도 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역사 관련 영상을 보다가 어떤 설명을 들으면 창려현에 있는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설명을 들으면 하북성 보정시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아래는 이덕일 박사가 두 가지 설을 비교하며 갈석산의 위치를 설명하는 내용인데, 이덕일 박사는 창려현 북쪽에 있는 갈석산이 맞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한서지리지 중 연지(연나라 지리지)에 나오는 구절에서 납득하기 힘든 구절이 하나 있다네요.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큰 도회지가 있다고 적혀 있다는데, 발해와 갈석산 사이의 거리가 좁아서 큰 도회지가 들어서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XAhPhStx44
뭣도 모르는 서민이지만, 저는 하북성 보정시 갈석산이 고대의 갈석산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다만, 그것이 연나라의 위치가 애매한데, 주나라가 소공 석에게 연을 현재의 북경 근처에 봉했다고 한다면, 제나라나 조나라와 거리가 가깝지 않습니다. 또 위 설명에서 연산산맥도 있다고 하고, 즉, 상호 협력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고대 중국 역사에는 숱한 유목민들과의 갈등이 있었는데, 그런 때면 제후국들간에 상호 협력이 빠르게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소공 석을 그 먼 곳까지 봉했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춘추시대로부터 중국 지도를 보면 연나라가 계속 북경 근처에 표시되고 있지요. 저는 조작이고 허위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당시에 단군조선과 주 왕조가 교류가 두텁고 단군조선은 수십의 거수국들 외에도 여러 유목족들을 통솔하던 나라였으므로 주나라 변방의 방어를 단군조선에 의존했다고 한다면, 주나라가 소공 석을 북경 근처 연나라에 봉했다는 그런 주장은 일리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역사를 모르지만, 주나라가 단군조선의 속국이라거나 제후국이라는 그런 주장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나 멀리, 더구나 큰 산을 하나 넘어서 봉지를 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만큼 단군 조선과 주나라와의 관계가 좋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서경 순전에 12주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우임금이 되면 다시 9주가 되는가 그렇습니다. 9주(州)가 12주(州)가 되었다는 것은, 고대 순임금 당시에 나름의 동서화합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만, 우임금대에 다시 9주가 되었으므로 순임금때 이루었던 동서간의 화합이 다시 희미해진 것일 수도 있는데, 아시다시피 우임금은 9년 홍수로 중국 전역의 홍수를 막기 위해 13년간 세 번 집앞을 지나면서도 집에조차 들어가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즉, 9주를 제외한 나머지 3주(州)는 당시 중국의 수계(水系)와는 일치하지 않았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잠깐 여기서 사군동후(肆覲東后)라는 구절에 대해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생각이 다르다고 하는데, 저는 사근동후 라는 구절에서 后라는 글자가 단군 조선의 수장 또는 번조선의 단군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자가 다르지 않습니까. 사근동후를 순임금 당시 동쪽 제후들이라는 뜻으로 쓰려고 했다면 후(侯)라고 썼어야지요. 게다가 남쪽 서쪽 북쪽에서는 사근X후(肆覲東后)라는 구절도 서경 순전에는 없습니다. 남쪽 서쪽 북쪽을 순행하면서 "동쪽에서 하던 것과 같이 했다"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글자는 侯가 아니라 后라는 것, 그리고 순임금 때는 12주 였다가 우임금 때 다시 9주가 된다는 것 등을 생각하면 사군동후(肆覲東后)에서 后는 적어도 순임금 당시의 고대 중국과 접경지역의 소단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관련 내용들을 검색하다보면 황하의 퇴적물 때문에 현재의 지리가 고대의 지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영상에서도 황하의 퇴적물이 아무리 많이 쌓인다고 해서 하북성 보정시에서 창해(滄海 : 발해)가 맑게 보일 수는 없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그건 알 수 없는 문제이지 않겠습니까. 중공 당국이 설령 연구조사를 해서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백석산이 갈석산으로 밝혀지더라도 공개하지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광개토태왕비 중 한 면이 유독 심하게 닳아 있다고 합니다. 그건 그 큰 비석을 어디서 옮겨왔다는 말이 됩니다. 100여년 전에 무슨 크레인이 있었겠습니까. 아니면 거대한 수송기가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어디서 끌어다 옮겼는지 한 쪽 면이 심하게 마모되도록 끌어서 이동시키기는 했거든요. 선산이 있으시다면, 제일 높은 할아버지 묘는 제일 높은 곳에 있지요? 그 다음 대(代) 할아버지 묘는 제일 높은 할아버지보다 조금 낮은 곳에, 그 다음 대는 좀 더 낮은 곳에... 그렇게 묘를 씁니다.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백석산과 창려현 갈석산의 해발 비교도 하시던데, 각각 2000M와 700M 정도라고, 700M는 끌어다 옮겨놓을 수있는 높이가 아닐까요? 만리장성도 지어낸 중국인데 비석 하나쯤이야... ㅡ,.ㅡ 위 영상에서 조조의 시 관창해(觀滄海)라는 시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면서 보여줍니다. 그런데, 근접 사진이라 옮길 수 없는 바위에 새겨진 것인지.. 그리고 조조의 시 관창해는 나중에 새긴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조조 당시에 새겨진 것이라는 근거도 없잖아요.
오늘 관창해가 새겨져 있다는 바위인지 뭔지 SNS마다 복사방지를 해 놓는 바람에 사진을 못구하다가 오늘 구했는데, 조조 당시에 아래와 같은 서체가 있었나요?
누군가 갈석산을 한반도내의 황해도 어디라며 주장했다는데, 황해도에 어떤 산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슬쩍 올라가서 바위에다 관창해 하나 새겨넣으면 그냥 조조가 올라간 갈석산 되는 것 아닌가요? "확실하지 아니하나... 글자 한 자가 같으므로 만리장성이 황해도까지 이어졌다"는 설이 만고불변의 절대진리가 되는 역사학계이고 보면 경상북도 대구 수성구에 있는 산이 갈석산이 될 수도 있고 그렇잖아요. 한자(漢字)가 다른가요? ㅡ,.ㅡ
아이야! 갈석산이 어디메뇨!
몰르겠는데요?
그래가지고서는 점제현 신사비를 콘크리트로다가 기초한... 2000년 전에 이미 중국에서는 콘크리트를 기초로 활용했다는 어마어마한 기록이 남아있게 되는데, 왜 중국에 콘크리트 건물들은 도무지 남은 것이 없는지... 그리고 2000여년 전부터 중국이 콘크리트를 활용했다면 우리나라, 즉 한반도 곳곳에 콘크리트 건물들이 남아 있어야 하거든요. 사대(事大)를 왜 하겠습니까. 어디에 대진(발해), 고려, 조선왕조 어디에 콘크리트 건물이 있습니까.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지들 영토가 넓어지면 넓어지는 대로 역사를 수정, 조작했다고 하지만, 일본은 고작 100여년 전쯤에 아시아에서 서구적 근대화를 선쥐했답시고 눈에 뵈는 게 없어져가지고서는... ㅡ,.ㅡ
어쩌면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도 갈석산이 아닐 수도 있고,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백석산이 고대의 갈석산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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