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고(故) 리지린 박사의 명복을 빕니다.(이하 고(故) 생략)
재작년에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를 한 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에 무지하여 세세한 기억은 못하지만 한 번 읽어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었습니다.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를 읽는 중에 리지린이라는 북한학자의 고조선 연구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마침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해역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라는 책이 나왔길래 작년에 구입했고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네요. 사실은 이덕일 님이 해역한 고조선 연구를 구입하기 전에 리지린 박사가 쓴 고조선 연구를 헌책방에서 몇 배나 비싼 값을 주고 구입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인쇄 상태가 매우 안좋기도 했지만 제가 몸이 너무 아파 책만 펼치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두통이 생겼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책을 구입해 놓고도 읽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해당 서적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는 1962년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까닭으로 남한에는 남북 교류의 일환으로 1980년대 말엔가 알려졌고,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에 쓰여진 책인데 - 책이라기보다 논문집 - 우리나라 고대사를 알고 싶다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나 조선상고 문화사와 함께 꼭 읽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사실 해당 서적들을 읽어도 우리나라 고대사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전하는 우리 역사에 관한 서적들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 중국에서 기록한 단편적인 기록들을 근거로 추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역사에 무지한 저로서는 이런 추천을 드릴만한 처지는 못됩니다. 다만, 몇 년 전에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식민사학자와 민족사학자로 양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게 뭔데?" "설마?" 등등의 반응을 하면서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등 몇 권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당 책을 쓴 저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로 말로만 듣던 조선상고사도 읽고 조선상고문화사도 읽고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도 읽고 뭐 그랬습니다. 저같은 무지랭이가 넘볼 수 있는 책들이 아님에도 아직까지 조선총독부의 지침대로 왜곡된 역사를 우리역사로 가르친다는 내용을 읽어 보고 "이런 썅~"하는 반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위에 열거한 책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억하느냐면 그렇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읽어나가는 동안에 불과할지라도 지은이가 주장하는 내용들에 대해서 얼마나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지 또 그 근거는 무엇인지 등을 설명하는 내용들을 보다 보면 "히야!" 하는 감탄과 또 순간이나마 엄숙한 존경의 마음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를 읽으면서 정말 많은 문헌을 활용했고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한편 찬성할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 고대의 사회상을 마르크스 엥겔스의 이론으로 재단했다는 것입니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나라 고대사회는 고도의 노예제 사회이며 그로 인해 빈익빈 부익부 상황이 한계에 이르렀고, 위만이 그러한 계급적 투쟁의 관계를 활용하여 조선을 탈취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서양에도 노예제가 있었습니다. 중세를 지나면서 농노제로 바뀌고 어쩌고 하면서 노동력을 착취하지요. 산업혁명 이후에도 노동력의 착취는 대단해서 마르크스 자본론 1권의 "노동일"에 관한 장(Chapter)을 읽어봐도 노동력 착취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양 사람이 서양 사회를 기준으로 저술한 내용을 교조적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은 불만이었습니다. 우리 고대사는 불명상태이기 때문에 실상을 거의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역사 기록에 고조선이 중국을 침략했다는 내용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고조선 이전에 숙신이나 식신이라고 불릴 때도 서주(西周)의 왕과 관계가 좋았다는 기록은 있다더군요. 한사군과 관련해서도 한무제가 쳐들어 온 것이지 위만이 한나라를 쳐들어 간 것은 아니었잖아요. 수나라도 당나라도... 모두 중국 쪽에서 껄떡거린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고대를 산 우리의 선조들은 침략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될 겁니다. 그리고 세금은 20분의 1이었고요.
맹자에 중국과 맥국의 세금 비교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중국은 10분 1세, 맥국(고대 조선족의 하나)은 20분 1세. 로마가 한창 팽창할 때 그들의 세금은 20분 1세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팽창을 중지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면서 세금이 오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화폐에 사용되는 귀금속의 성분을 줄이거나 이물질을 포함시켜 무게만 맞춘 화폐도 만든 것으로 압니다. 그런 것을 보면 고조선은 한나라가 침략하기 전까지는 상당히 안정적인 사회였을 수 있습니다.
또 한편, 한국의 고대를 고도의 노예제 사회라고 추측하던데 이 역시 사실은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책에서는 계급으로서의 노예가 아니라 평민이지만 경제적으로 빈민이어서 경제적 예속관계로 봤을 때 노예나 다름없었다 라고 설명하는데, 한국 고대의 정치체제가 중국처럼 중앙집권적인 것이 아니라 지방분권적(윤내현 고조선 연구 참고)이라 권력이 적절히 분배되어 있었다면, 그리고 산천(山川)을 중시하여 읍락의 경계를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책화(責禍)"라는 제도가 있었다는 내용 등을 고려하면 저자인 리지린 박사가 과하게 추정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책 내용 중에 "고조선인이라고 해서 특별한 도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IMF 때 금을 모으거나 태안 기름 유출 사고에 100만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 국채보상운동, 임진왜란 당시의 전국 각지의 의병 등등. 민족성을 고려하면 혹시 고조선인들이 리지린 박사의 생각과는 달리 조금 특별한 도덕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일본의 그 민도 말고... ㅡ,.ㅡ)
물론 조선왕조 말엽에 삼정이 문란해서 백골징포도 하고 황구첨정도 하고 그러긴 했는데, 그건 중국 송나라의 주자가 가르친 것이지 우리 고유의 가르침은 아닐 겁니다. 사실 주자가 그렇게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는 주자의 가르침을 벗어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해서 선비를 죽이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니 백골징포나 황구첨정은 주자가 가르쳤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고려 때 거란이 쳐들어 왔을 때도 서희가 "야 우리 다 고구려 후예들 아니냐!" 라고 했다던데 통하는 게 있었다는 말이겠지요? 일개 외교적 발언 한마디로 요(遼)나라를 물러서게 했다면, 시대가 다르긴 했지만 그만큼 강한 연대의식이 있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서희와 그 시기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조차 드는 내용이지요.
어쨌거나 역사도 전해지는 게 희박해, 고유의 가르침이라는 "풍류"도 그 내용을 몰라... 아무것도 몰라. 게다가 관심도 없어. 이런 시점에 고조선과 관계가 있는 중국의 모든 문헌을 뒤져 사막에서 바늘 찾는 심정으로 애쓴 그 불굴의 노력때문에라도 한국인이라면 꼭 한 번은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두계 이병도 선생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단을 황해도 수안현으로 비정하고 싶다고 한 이후 만리장성의 동쪽 끝단은 황해도 수안현이 되었다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정설"입니다. 문헌적 근거가...? 그런 건 없었던 것으로 알아요. 동네 주민들 몇 명이 뭐라뭐라 말한 것 가지고 그걸 근거삼았다는 것 같더군요. 그게 몇 십년 전인데, 중국에서 두계 이병도 선생의 학설을 높이 인정하여 - 중국의 입장에서는 탁견일 수 밖에 없잖아요! - 역시 황해도 수안현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주장했고 동북아 역사재단에서도 아마 그 역사적 사실(?)을 공인한 것으로 압니다. 황해도 주민들의 역사인식도 대단하죠? 몇 천년 전의 일들을 두계 선생이 살아있을 당시까지 상기하며 언급을 할 정도니까. 그런데,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라는 책은 희안하게 "...하고 싶다" 는 식의 주장은 없었던 것 같네요. 이책 저책 원문을 인용하며 어찌나 세세하게 따지는지 읽다가 헉헉거린 게 한 두번이 아닙니다. 꼭 이렇게 갖가지 문헌 들먹이며 심하게 따지면서 단군사화(檀君史話)를 잘 살펴봐야 한다거나 하는 주장을 하면 유사역사학자니 사이비 역사학자니 하는 말을 듣는다고 하는 것 같던데, 저자인 리지린 박사는 이미 돌아가셨다고 하니 그래도 심적부담은 덜하실 것 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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