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원문/참전계경

참전계경 : 제 1사(事) : 성(誠)

참그놈 2021. 2. 9. 08:32

聖靈章(성령장)

聖靈在上, 主宰人三百六十六事, 其綱領, 曰誠, 曰信, 曰愛, 曰濟, 曰禍, 曰福, 曰報, 曰應.

성령재상, 주재인삼백육십육사, 기강령, 왈성, 왈신, 왈애, 왈제, 왈화, 왈복, 왈보, 왈응.

 

신성한 영이 지극히 높은 사리에 계시면서 사람의 삼백예순여섯가지 일을 다스리시니, 그 강령은 첫째 정성, 둘째 믿음, 셋째 사랑, 넷째 구원, 다섯째 재앙, 여섯째 행복, 일곱째 갚음, 여덟째 응답이다.

(다음 번 포스트에서는 음과 뜻은 생략합니다.)

 

第一事

誠者衷心之所發, 血性之所守, 有六體四十七用.

성자충심지소발, 혈성지소수, 유육체사십칠용.

誠之六體者, 一體敬神, 二體正心, 三體不忘, 四體不息, 五體至感, 六體大孝也.

이 구절은 제가 임의로 추가한 것입니다.

 

 

참전계경 제 1사(事)는 성(誠)입니다. 성(誠)은 보통 정성(誠)이라고 번역합니다. 번역상으로 성(誠)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고 자신의 참본성(血性)을 지키는 것이라고 되어 있네요.(한문화 출판사, 천지인)

 

우리나라에는 참전계경에 대한 누대에 걸친 주석서 같은 것이 전하지 않습니다. 전하는 것이 있는데 제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현재 중국(China)에는 사서대전(四書大全) 같은 것이 있어서 글자 하나 구절 하나에 적지 않은 주석이 붙어 있기도 한 것으로 압니다. 특히 조선왕조는 유학을 숭상하여 600여년 내내 주자 성리학만을 익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왕조가 문을 닫은 것이 100여년 전이라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사서가 빠지지 않는 권장도서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즉, 조선왕조 때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어서 어쩌면 유학(儒學) 경전을 대하듯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학(儒學)을 도입한 이후 우리나라는 더욱 약화됩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등을 겪지요. 유학이 문치에 치중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을파소(乙巴素)는 고구려의 재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였습니다.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다섯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다고 하던데, 대막리지가 다섯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다면 그 아랫 사람들도 칼을 몇 자루씩은 휴대하고 다녔을 겁니다. 군사력이 강력하였다고 하여 이웃나라를 침략하려는 그런 속성이 있다거나 좋은 무기를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고구려를 구성하고 있던 구성원들이 그 만큼 강건하고 무예에 능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상무(尙武)정신이라고도 하는 것 같더군요. 을파소가 재상이 되기 전에는 고구려 사회도 약간 혼란스럽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외척들이 권력을 남발하였다고 하니까요.

 

어쟀거나, 조선의 유학(儒學)과 달리 문헌에만 의지하여 수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예 수련이 일상화 되어 있는 사회에서 성(誠:정성)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일단은 성(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 이라는 뜻 외에는 사실 잘 모르겠네요. 다른 하나는 혈성(血性 : 사람의 참 본성)이라는 것인데, 이것 하나는 송나라 주자의 대학장구 서문에 있는 것과 다른 듯 하네요.

 

蓋自天降生民,則既莫不與之以仁義禮智之性矣.

(대개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이미 인의예지의 성(性)을 주었다)

 

라고 하여 인의예지의 성(仁義禮智之性)을 표기하고 있는데, 참전계경에서는 혈성(血性)이라고 쓰고 있으니까요.

 

숨을 쉬는 동안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고, 사람이 살아있으면 피는 사람의 몸을 돌게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활동상태나 감정상태에 따라 피는 빨리 돌기도 하고 느리게 돌기도 하며, 몸이나 얼굴이 붉게 나타나기도 하는 등의 변화를 보입니다. 사람이 마음을 쓰고 활동하는 방향에 따라 피도 함께 움직이지요. 번역에는 참본성 지키는 것 이라고 하였지만, 참본성 지키려 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뜻이 달라질까요? 둘의 해석 차이를 알기 위해서라도 참본성이 뭔지 우선 알아야 되겠네요.

 

고구려는 수나라 양제의 100만 대군을 포함하여 수 차례의 침공을 막아냅니다. 당나라의 공격도 초기에는 막아내지요. 이는 고구려의 상하가 모두 일치단결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사실일 것입니다. 또, 무예수련이 일상화 되어 있었지만 아무 때나 시도때도 없이 칼을 휘두르는 사회는 아니었다는 것을 대변하기도 할 것입니다. 정형화된 무예 수련 과정이 있었고, 무예 수련의 목적이 해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데 있으므로 그에 대한 여러가지 사회적 규범들 역시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편, 고구려가 있을 당시 이태백이 고구려에 갔다가 고구려인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면서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습니다. 즉, 고구려에 상무의 전통이 있었다고 해서 반드시 무예를 우선하는 나라였던 것은 아니라는 반증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고구려는 문무를 겸전한 나라였을 수도 있지요. 그런 고구려의 모든 사회적 규범의 근간이 곧 성(誠)이 아닐까? 일단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 드라마 무인시대(武人時代)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 무인들이 문맹이었다는 식으로 연출을 하였던데, 당시 그 드라마를 보고 상당히 놀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장수라면 응당 병법 - 손자병법, 육도삼략, 사마병법 등등 - 을 익혔을 것이니 문맹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고려는 후고구려 시대 양길이나 기타 지방 토호가 세력을 장악한 그런 막장시기는 아니었거든요. 조선시대에는 1인지하 만인지상의 벼슬이 영의정이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시중(侍中)이었습니다. 장보고도 노예 검투사에서 출발하여 해상권을 장악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대조영도 연개소문 집안의 노비였나? 드라마에서는 뭐 그렇게 시작을 하지요? 고려 이상으로 올라가면 희안하게 우리 스스로 우리 선조들을 비하시키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네요. 태왕사신기는 그런 면에서 매우 의외의 드라마이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