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나 중국사에서 요동의 위치가 논쟁의 핵심 중 하나라고 합니다. 요동의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 역사상의 강역이 달라진다고 하는군요. 현재 중국이나 대한민국 일부 역사가들은 요동이 현재의 요하 동쪽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한국의 민족사학계에서는 요동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위치가 변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요동은 후대에 명명된 것이며 고대에는 북경 근처에 있는 난하 이동을 요동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일개 서민이고 역사에 문외한이지만 저는 요동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동이라는 지명을 요하 동쪽이다 또는 북경 근처를 흐르는 난하 동쪽이다 또는 계 라고 하여 북경 지역의 동쪽이다와 같이 특정 지명을 지칭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고대의 지리 개념이 지금처럼 위도와 경도를 표시하고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면 현재 자신이 있는 위치와 검색되는 위치의 거리를 곧바로 알 수 있다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요동은 고대의 중국인들에게 동쪽변방이라는 뜻의 막연한 의미였지 특정한 위치를 찍어서 말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땅이 네모 모양으로 생겼다고 믿었으며 땅끝에 이르면 떨어져 죽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부시맨이라는 영화를 보시면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신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면서 부시맨이 땅끝이라고 생각하는 폭포에 콜라병을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부시맨이라는 영화가 500년 전이나 1000년 전에 나온 것이 아니라 30여년 전에 나온 영화입니다. 21세기를 바라보는 20세기 후반에도 지구가 네모로 생겼다고 알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요. 물론, 고대 중국인들의 지리 지식이나 인식 등이 부시맨과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고대 중국에 오복(五服)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중국 왕이 사는 방 천리(사방 천리) 밖으로 전복, 후복, 수복, 요복, 황복 등으로 구획하여 각 구역마다 500리씩 간격을 둔 지역 구분법입니다. 고대로부터 낙양이나 장안은 중국에서 명멸했던 여러 왕조들의 수도로 이용되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소위 화하족은 낙양이나 장안을 중심으로 모여살았다는 말이 되며 그들에게 있어 요동은 아득하게 멀리 있는 곳이었다는 뜻이었지 어느 지역 어느 동네부터는 요동이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시절에 자동차나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어서 수시로 요동을 왔다갔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니까요.
그러나, 한중간의 역사적 강역과 관계가 있으므로 요동이 어디냐 하는 것을 막연하게만 생각하면 안된다는 맹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리하여 짱구를 굴려본 것인데 고대 중국의 구획법을 기준으로 보면 요복 300리 안은 이족(夷族)이 살고 나머지 200리는 범법자들이 살았다고 하며, 황복 300리 안은 만족이 살고 나머지 200리는 중죄인들을 살게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 중국인들의 구획법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중국인들이 요복이라고 생각했던 지역 밖을 요동으로 여긴 것은 아닐까? 또는 황복이라고 생각했던 지역 밖을 요동으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고대 중국인들의 인식을 고려해서 그렇게 생각해 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요동은 낙양이나 장안에서 2500리 또는 3000리에 해당하는 그 지역의 외부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즉, 요복을 기준으로 한다면 동쪽 2500리 밖은 모두 요동이 되는 것이고 황복을 기준으로 한다면 3000리 밖이 모두 요동이 되는 것입니다.
요동이 지금처럼 요하 동쪽이라는 확고한 위치로 비정된 것은 중국을 요나라가 장악한 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또 요동이라는 위치를 칭하는 명칭을 쓴 것은 고대 중국인이지 한민족(韓民族)은 아닌 것으로도 알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의 지리 관념 속에 있던 요동이므로 고대 중국인들의 관념에 따라 요동의 위치를 대강이나마 짐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고대 중국인들의 관념에서 요동은 왕이 사는 곳에서 멀리 있는 곳이었지 북경 동쪽 어디거나 요하 동쪽은 절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요복이나 황복에는 범법자나 중죄인이 살았다고 하니 고대를 살다 사라진 중국인들 중에 요복이나 황복에 살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기도 하고요. 어떻게든 높은 곳(관직)으로 올라가려 했던 것이 인지상정이고 보면 북경조차도 너무 멀리 잡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중국 춘추시대부터 북경 근처에 연나라가 있었다고 합니다. 연나라는 처음부터 그 곳에 터전을 잡은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나라 초기까지 흉노에게 만방으로 깨지던 중국이었고 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자 중국이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영토 역시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대 중국 변경에 위치하던 지명을 확장된 영토에 따라 더욱 멀리 위치시키고, 중국의 위세가 유지되면서 지명도 고정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아래 지도는 어느 블로거께서 연나라는 시대에 따라 위치한 지역이 달랐다면서 연나라의 위치가 변천한 과정을 지도에 표시한 것입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고대 최초의 요동은 아래 지도에서 연5 와 연3.6 이라고 사이의 어느지역이었다가 중국이 성장하면서 점차 멀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 물론 사료적 근거는 모르겠습니다. 역사에 문외한이기도 하고요. -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요나라가 성장하면서 요하 동쪽을 요동으로 칭하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장안이나 낙양을 기준으로 했을 때, 중국의 성장과 함께 요동이 점점 멀어지게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고대의 요동은 중국인들의 관념에서 어떤 지점을 기준으로 여기서부터는 요서, 여기서부터는 요동 이라는 거리적 개념이 아니었다는 것이며, 중국이 성장함에 따라 영토가 넓어지고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또 중국 역사에서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역사상에 있었기에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정확한 위치를 비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너 어디사냐?
서울에 산다.
서울이 다 니 집이냐? 서울 어디?
강남에 살어.
강남이 다 니 집이야?
서울 강남 00동에 살아....
그쯤 되고 나니 더 묻지 않습니다. 고대의 요동 역시 그냥 동쪽 변방 어디였을 뿐인데 중국이 성장하면서 점점 더 구체화 된 것이지요. 위에 인용한 것이 서울이라 그렇지 만약이지만 다른 생소한 지역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 지역을 이해하거나 인식하게 될까요. 서울은 그나마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지역이지 않습니까. 서울 대신 네브레스카에 산다거나 몽벨리아르에 산다거나 하면 어떻게 생각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고대 중국인들의 관념 속에 요동은 그런 곳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몽벨리아르나 네브레스카는 의도적으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요동은 몽벨리아르나 네브레스카를 아는 사람에게는 아는 지역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냥 멀리 있어서 어디인지 특정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지 않았을까? 하는 뜻으로요. 그리고 고대 중국인들 중에 요동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겠습니까.)
역사에 문외한인 일개 서민입니다. 뇌피셜이므로 재미삼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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