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樂音洛】
예전에 논어를 한 번 읽으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朋友의 차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붕(朋)은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친구라고 하고 우(友)는 뜻이 같은 친구를 말한다고 해설한 것을 봤는데, 공자는 스승이 없지 않나요? 노자에게서 예를 물었다는 내용은 어디서 봤는데, 그 외에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찾아다니면서 물어물어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딱히 공자에게 스승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學자를 해설하면서 앞서 깨달은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해설은 공자를 존숭하므로 말이 되는데 붕(朋)이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친구를 말한다고 한다면 말이 달라지지 않나요?
논어 어느 부분인지 모르지만 공자가 자신은 비천했다면서 그래서 잡다하게 아는 것이 많았다고 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잡다하게 알던 것 외에 근원적인 의문이 있었는데, 그 의문을 해소하고자 여러 사람을 찾아다녔나 봅니다. 그런 내용이 어딘가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현재는 기억이 안나네요. 신영복 교수의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이라는 책에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 있더군요.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보다 좋은 제자를 만나기가 더 힘들다는 말도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공자가 공자(孔子)라고 존숭되기 전에 공구(孔丘)라고 불렀는지 중니(仲尼)라고 불렀는지 모르지만 공자는 공자가 되기 전에는 좋은 제자였나봅니다.
集註 : 朋同類也. 自遠方來, 則近者可知. 程子曰, 以善及人, 而信從者衆故, 可樂.
집주에는 붕(朋)을 동류라고 해석을 했네요. 제가 봤던 어떤 책에는 앞에서 쓴 것처럼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친구를 붕(朋)이라고 한다더니, 그렇다면 뒤에 나오는 여러 주석 중에 무리를 이루어야 락이라 할 수 있다는 설명도 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공자가 제자 3000을 거느려 10철 72현을 배출했다는 것을 근거로 공자의 생애에 비추어 무리를 이루는 것이 곧 락(樂)이라고 주석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백가쟁명의 시대였습니다. 도가도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묵가도 무리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는 내용이 사실인지 아니면 노장 사상을 추구하는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공자의 생애를 보면 특정한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치려(學) 노력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노자나 묵자나 다들 뭔가 스스로 논리를 찾고 궁리하고 뭐 그랬다고 하면 생각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동류(同類)는 오히려 묵자나 노자 등이 되는 것 아닐까요?
朱子曰, 理義, 人心所同然, 非有我之得私也. 吾獨得之, 雖足以說矣. 然告人而莫信, 率人而莫從, 是獨擅此理, 而人不得與於吾心之所同也. 如十人同食, 一人獨飽, 而九人不下咽, 吾之所說雖深, 亦曷能達於外邪. 今吾之學足, 以及人而信從者又衆, 則將皆有以得, 其心之所同然者, 而吾之所得不獨爲一己之私矣. 吾之所知, 彼亦知之, 吾之所能, 彼亦能之, 則其懽欣宣暢. 雖宮商相宣, 律呂諧和, 何足以方其樂哉. 此學之中也, 又曰, 近者旣至, 遠者畢來, 以學於吾之所學, 而求以復其初. 凡吾之所得, 而悅於心者, 彼亦將有以得而悅之, 則可以見夫性者萬物之一原. 信乎, 其立必俱立, 成不獨成矣.
인심은 모두 똑같다면서 10인이 함께 밥을 먹으며 한 사람만 배가 부른 경우를 예로 들었네요. 한 사람만 배가 부르면 안된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역사에는 소수의 누군가만 배가 불렀던 그런 내용들이 많더군요. 남한산성인가? 영화에서도 병사들이 추위에 떨면서 동상이 걸리고 그러는데 양반들의 옷을 나눠입히자고 했더니 옷을 나눠줄 수 없다는 그런 부분이 나오지 않습니까.
뭐 어쨌거나 요즘은 유교사회라고 할 수 없으니... 영화 이야기 하는 김에 드라마 이야기도 하나 할까요? 추노 라는 드라마가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TV가 없어서 그 드라마를 못봤는데, 대학장구 서문을 보면 사람마다 성(性)을 부여받았으므로 성분과 직분에 따라 맡은 일을 하게 한다고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유학(儒學)의 이상에는 노비가 없어야 정상 아닌가요?
모르겠네요. 조선왕조의 법을 아는 것도 아니고...
○善, 不是自家獨有, 人皆有之. 我習而自得, 未能及人, 雖悅未樂.
위 해설과 비슷한 말인데, 락(樂)은 혼자서 즐거워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만 이해가 되네요. 함께 즐거워야 락(樂)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음악(音樂)에 樂자가 있는 것은 여러 악기들이 화음을 이루기 때문일까요?
○問, 以善及人而信從者衆, 是樂其善之可以及人乎. 是樂其信從者衆乎. 曰, 樂其信從者衆也. 大抵私小底人, 或有所見, 則不肯告人, 持以自多. 君子存心廣大, 己有所得, 足以及人, 若已能之, 以敎諸人, 而人不能, 是多少可悶. 今旣信從者自遠, 而至其衆如是, 安得不樂.
선(善)이 타인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믿고 따르는 이가 늘어나는 것(信從者衆)이 선(善)이 다른 사람도 선해지는 것을 기뻐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리를 이루는 것이 기쁜 것인지 묻습니다. 무리를 이루는 것을 기뻐한다(樂)고 설명하고 있는데, 저는 다른 사람도 선해지는 것을 기뻐하는 것(樂)에 주의가 가네요. 무리를 이루지 않아도 다른 사람도 선해지면 독서궁리 할 것이고 배우려고 할 것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위 해설 역시 공자가 살던 시대 공자의 제자가 3000여명에 달했다는 것을 근거로 아마 후자쪽을 락(樂)이라고 설명했나본데, 학습(學習)이 둘이 아니라고 설명하듯, 다른 사람도 선해지는 것과 무리를 이루는 것 두 경우가 별개의 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굳이 분리하여 개별적으로 따진다면 다른 사람도 선해지는 것을 기뻐한다(樂)는 쪽이 나아 보입니다. 유학도 성리학도 뭐 아무것도 모르면서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된다는 뜻입니다.
○信從者衆, 足以驗己之有得, 然己旣有得, 何待人之信從, 始爲可樂. 須知己之有得, 亦欲他人之皆得然, 信從者但一二, 亦未能愜, 吾之意至於信從者衆, 則豈不可樂.
믿고 따르는 사람이 한 둘에 불과하면 아직 즐겁다(愜)고 할 수 없다...? 지음(知音)이라는 성어도 있고 논어 학이편 마지막 장은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인 것으로 보아 공부를 더 할 생각을 하고 적게 모인다고 즐겁지 않다고 하면 안될 듯하네요. ㅡㅡ
○問, 朋來之樂奈何. 曰, 惟以程子之言, 求之. 然後, 見夫可樂之實耳. 且其以善及人而信從者衆之云, 纔九字爾, 而無一字之虛設也. 非見之明, 而驗之實, 其孰能與於此.
밑줄 그은 9자 중에 어느 것 하나 쓸모없는 글자가 없다고... 앞의 설명과 일관된 내용인데, 글쎄요? 유학자들이 모여서는 이기윌원론이 맞느니 이기이원론이 맞느니 하면서 끝없는 논쟁을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실사구시를 구하는 학문이 일어났을 때도 문체반정이라는 말도 있었고 뭐 그랬지 않습니까. 역사를 잘 몰라서... ㅡ,.ㅡ
실학이 원래 공자의 사상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신영복 교수의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을 봤더니, 물긷는 노인이 편리한 기계를 안 쓰고 자신이 직접 물을 퍼다 나르는 것을 보고서는, 자공이 왜 기계를 쓰지 않고 힘들게 직접 퍼다 나르느냐? 라고 물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긴 사대부들은 물을 직접 긷지 않았겠네요. 하지만, 그 일화에서 질문을 한 사람이 자공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겠지요?
○南軒張氏曰, 有朋自遠方來, 則己之善得, 以及人, 而人之善, 有以資己, 講習相資, 其樂孰尙焉. 樂比於說爲發舒也.
서로가 아는 것을 강습하며 비로소 피어난(舒) 것이다 라는 내용인데 이런 해설은 또 긍정적으로 보이네요.
○新安陳氏曰, 以善之善卽上一節, 人性皆善及明善之善, 習說則善方成己, 朋來則善方及人矣.
사람이 모두 선(善)하고 선을 밝힌다(明善)의 선(善)도 같은 것이라며, 친구가 찾아오는 것이 바야흐로 다른 사람에게 그 선(善)이 미친 것이다. 라는 말인데, 위에 나온 설명들과 비슷한 내용이지만 반복해서 익히며 즐거움을 느낄 때 비로소 기(己)를 이룬다는 習說則善方成己 구절은 눈여겨 볼만 하다고 생각되네요. 몸이나 자기를 뜻하는 글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我吾余予身己體軀 등등.
集註 : 又曰, 說在心, 樂主發散, 在外.
발산(發散)이라고 집주가 붙어 있는 것이 돋보이네요. 김부식의 삼국사(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나 모두 효자 효녀를 기록하고 있거든요. 고려사 열전에도 아마 있지 않겠습니까. 그 외에도 효행록이라는 책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누가 봐도 돋보인다는 말이겠지요?
朱子曰, 程子非以樂爲在外也. 以爲積滿於中, 而發越乎外耳. 悅則方得於內, 而未能達於外也.
○說, 是感於外, 而發於中樂, 則充於中而溢於外.
위 두 주석은 속에서 차올라 넘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네요. 물은 흐르다 구덩이가 있으면 구덩이가 다 차야 다시 흐른다는 그런 내용이 떠오르네요.
○慶源輔氏曰, 說, 是自知自能而自悅, 樂, 是人皆知皆能, 而我與人同樂.
열(說)과 락(樂)을 설명하는데, 사람마다 모두 알고 행하여 모두가 함께 즐거운 것이 락(樂)이라면, 인(人)자 하나를 추가하여 樂, 是人人皆知皆能, 而我與人同樂. 라고 했으면 어땠을까요? 훈민정음 서문에 "사람마다 회여 수비 니겨 날로 쑤메..." 그 부분을 한문으로 쓰면 人人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앞 부분에 信從者但一二, 亦未能愜, 라는 부분이 있었는데, 人자를 한 자만 써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雙峯饒氏曰, 說與樂皆是在中底. 今此樂字對上文說字而言, 則是主發散在外, 言之.
열(說)과 락(樂)들 대비(對比)했을 때 밖에 있다는 것(在外)이지 열(說)과 락(樂)은 모두 마음 속에 있다네요.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는 3000여 제자를 가르친 공자의 생애에 비추어 주석을 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약간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없지 않네요. 뭐 일반적인 경우라도 명인(名人)을 찾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다만, 항상 배우고 익히기를 바라며 스승을 찾는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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