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원문/삼국사(삼국사기)

강수는 월성 석씨 18세손이다

참그놈 2022. 6. 27. 17:11

가야와 관련한 논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에는 임나일본부니 하는 말이 나오지도 않지만, 가야사 특별전을 개최하거나 가야유적 세계 문화유산 등재추진 등은 일본서기를 기준으로 진행한다거나 하는 내용의 비판 영상을 몇몇 보았는데, 일본은 임나가 가야다 라고 주장하고 있고 우리나라 역사학계도 일본과 비슷한 논리를 주장하고 있답니다. 아래 내용이 그런 주장의 근거를 반박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하는데 저는 역사에 문외한이라 잘은 모르겠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1coUjXFxV1I 

 

 

김부식의 삼국사(삼국사기)에 강수열전(强首列傳)이 있습니다. 아래 내용이 강수열전 초반부의 내용인데 강수의 아버지는 석체나마라고 되어 있는데 昔諦 라는 이름(姓名)이 월성 석씨 족보에 나온답니다. 성이 석씨고 이름이 체 라고 합니다. 석탈해의 성이 까지 작(鵲)에서 새 조(鳥)자를 뺀 것이라는 것 아시지요?

 

强首, 中原京沙梁人也. 父昔諦奈麻, 其母夢見人有角 而妊身, 乃生, 頭後有高骨. 昔諦以兒就, 當時所謂賢者, 問曰, 此兒頭骨如此何也. 答曰, 吾聞之伏羲虎形, 女媧蛇身, 神農牛頭, 皐陶馬口, 則聖賢同類, 而其相亦有不凡者, 叉觀兒首有黶子, 於相法面黶無好, 頭黶無惡, 則此必奇物乎. 父還謂其妻曰, 爾子非常兒也. 好養育之, 當作將來之, 國士也.

 

태종대왕(신라)이 성명(姓名)을 물었는데, 신(강수)은 본(本) 임나가량인 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본(本)이라는 글자를 본관이나 관향의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 임나가 가야라거나 하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고 합니다.

 

及太宗大王卽位, 唐使者至傳詔書, 其中有難讀處. 王召問之, 在王前一見說釋無疑滯. 王驚喜, 恨相見之晩, 問其姓名, 對曰, 臣本任那加良人, 名字頭(, 趙炳舜本作牛). 王曰, 見卿頭骨, 可稱强首先生, 使製廻謝唐皇帝詔書表, 文工而意盡, 王益奇之, 不稱名, 言任生而已.

 

 

위 영상에는 다파나국의 위치에 대한 내용도 인용을 하는데, 고대의 왜(倭)를 현재의 일본열도 전체로 보면 곤란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더구나 석탈해 이야기는 무려 2000여년 전 이야기지 않습니까. 당시에 야마토 왜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고대 일본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에서 이주해 간 한반도인들이 세운 여러 소국들이 여럿 있었을 것이고 그 중에 하나가 다파나국이 아닐까 합니다. 일반 서민이라 역사를 잘 모르지만, 저는 삼한삼국 일본열도 분국설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일본에 가야계 지명이나 고구려 계통의 지명이 지천으로 널려있다는데, 양직공도의 그림을 봐도 왜(倭)의 사신은 신발조차 신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나라에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앞다투어 조공을 바치러 갔다는 일본서기의 망설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이 일본서기를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덕일 박사 영상을 봤더니 일본서기는 조공에 환장했다고 할 정도로 적혀 있다더군요. 일본이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되지 않았나요? 미국이 일본에 조공을 바치러 멀리서 시꺼먼 배를 타고 왔다고 주장하지는 않나요?

 

삼국사(삼국사기) 관직편 등에도 왕으로부터 그 아래 각 관직이나 직급에 따라 옷의 색깔이나 장신구 종류를 모두 다르게 규정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신라 말의 모습일 수도 있기는 하지만, 진작부터 당나라 제도를 따랐던 신라였고 당나라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예를 따르지 않았겠습니까. 옷, 장신구, 집의 크기, 마차를 끄는 말의 마릿수 등등 신분과 계급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옷의 종류부터 등급에 따라 모두 차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맨발로 외국에 사신으로 갔다는 것은 신발조차 없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날씨가 몹시 후텁지근해서 나막신이 보편화되었다는데 나막신조차 신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의 교통이나 이동 상황을 고려하면 양직공도에 묘사된 왜의 사신은 왜가 외국에 사신을 처음 보낸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여러 추측들처럼 실제로는 양나라에 왜가 사신을 본낸 적이 없는데 양나라에서 과시용으로 그 이전의 사서를 참고하여 상상으로 그린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외국에 사신왕래를 여러 번 했다면 그 나라의 문물을 보고 듣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신을 아무나 갑니까. 그 나라에서는 엘리트 계층이라는 말인데, 그럼에도 신발도 없이 그리고 의복 등의 상황을 보면 왜가 사신을 처음 파견했든지 아니면 양나라에서 문헌을 근거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렸던지 뭐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왜(倭)에 관한 내용도 있다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김부식 삼국사(삼국사기)에 왕인 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기도 하고 그랬다지 않습니까. 양나라는 6세기의 일이고 왕인 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한 것은 그 보다 200여년 이전의 일입니다. 백제와 일본간의 교류가 수 백년 지속되었다고 가정하면 신발 조차 신고 있지 않은 왜 사신의 모습을 사실이라고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기는 하네요.

 

 

어쨌거나 일본이 근대화를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이루자 눈이 뒤집혔는지 일본의 역사 조작이나 날조 왜곡이 100년을 넘게 이어지고 있는데, 중국이 옳다꾸나! 하고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넙죽넙죽 받아먹고 있고...  참 서글픈 일이지요? 위 영상에서 소개하는 논문이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는지 저는 역사학도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기는 한데, 역사를 규명하려 애쓰시는 분들의 노고에는 감사드려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