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원문/삼국사(삼국사기) 55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원문 (백제가 수상하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오피스(ODT) 파일입니다. 백제본기는 신라본기의 절반밖에 안되지만 의아하게 생각되는 부분은 더 많습니다. 아래 스크린샷 보시면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서 산이 무너진 곳이 40군데나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해당 기사가 신라본기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백제와 신라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신라본기에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 의아하네요. 물론 가야가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 있었습니다만 AD42년에 건국하여 180여년이 지난 시점인데 하필 산이 무너진 곳이 가야와 국경을 마주한 부분이었을까요? 그러나, 산이라는 것이 아무리 작아도 40여곳이라면 그 범위가 제법 넓어서 신라의 서쪽 산 곳곳에 산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원문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백제본기는 6권으로 신라본기의 절반 정도입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내용이나 의외의 내용이 많이 나오네요. 물론 이는 역사도 역사학도 모르는 일개 서민의 관점입니다. 말갈을 제가 가지고 있는 책에는 고조선의 부족이라고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여지껏 말갈, 여진, 거란 등이 고구려의 휘하에 있었다는 생각만 했지 고조선까지 소급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해당 부분은 의외였습니다. 해당 스크린샷에는 백제 건국 초기 낙랑이 나오는데 워낙 낙랑이 많이 나와서 어던 낙랑인지 모르겠습니다. 백제가 천도를 하려고 마한 왕에게 먼저 알리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옮기려고 하는 동쪽이 평양이라고 합니다. 이해 되세요? 물..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10 원문 (초기 고구려 위치는 어디?)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10 원문입니다. 한글(HWP)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아래 스크린샷은 보장왕 27년 2월조 기사입니다. 제가 보고 있는 해설서에는 고구려가 한나라에서 분리독립한 것처럼 설명되어 있네요. 왕망이 전한을 뒤엎고 15년 정도 신(新)나라를 세운 적이 있습니다. 왕망의 성이 왕씨가 아니라 김씨라는 말을 들었는데 정확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왕망이 전한을 뒤집을 때 당시 고구려가 도왔다는 이야기는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은 있습니다. 하지만 공조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는지 왕망이 고구려는 하구려라고 부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고조선이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소속이 불분명하던 시절 어쩌면 중국 한(漢)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아래 스크린샷..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 9 원문 (압록수는 어디냐?)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 9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연재소문에 관일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나라나 당나라와의 전쟁을 극복하는 모습을 드라마 등에서 구현하는 것을 보면 보면 고구려 사회는 자의반타의반 무력이 지배했던 사회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학과 불교가 성행하고 있고 도교 역시 들여와야 한다고 연개소문이 주장하는 모습에서 매우 의외의 모습이 고구려에 있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조선시대에 숭유억불 정책으로 절(寺)들이 산으로 이전해 갔습니다. 그리고 8천이라고 해서 백정이나 기생 등 천민을 정의한 것이 있는데 승려를 천민으로 분류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고구려 사회에서..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8 원문 (평양은 어디인가?)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8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백제본기에도 고흥이 서기를 지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고구려도 600년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다고 나옵니다.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문자는 아마 한자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한자를 이용하여 신집을 지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전에 쓰인 유기 100권은 한자가 아니라 다른 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발해(대진고려)와 당나라 간의 외교 관계에서 발해(대진고려) 문자를 이해하지 못해 이태백이 번역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이태백이 여행을 하여 동방으로 왔다가 고구려에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태백..

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 7 원문 (살수는 어디냐?)

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 7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무찌른 살수를 우리는 청천강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정작 김부식은 살수가 어딘지 모른다고 기록했습니다. 비단 살수 뿐만이 아니라 삼국사기 잡지에 지명을 알 수 없는 곳이 500군데가 넘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은 고려의 수도는 개경이었다는 것입니다. 살수가 청천강이라면 개성과 가까운 곳인데 인근 지명에 관한 사실여부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고수전쟁이나 고당전쟁도 처절했지만 신라나 백제와의 다툼도 격렬했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전쟁 중에 많이 소실되었을 수도 있지요. 살수가 청천강이라면 고려의 수도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인데 살수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6 원문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6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아래 스크린샷에는 위나라에 조공했다는 기사가 많지 않은데 이후로는 중국 여러 나라에 조공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중국 역사를 잘 모르는지라 저 위나라가 조조의 위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아는데 어떤 위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혹시 북위인가? 어쨌거나 당시 상당한 외교전을 펼치는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조공했다는 말만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네요.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5 원문 (숙신이 1000년이나?)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5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아래 스크린샷 보시면 관구검이 쳐들어 온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만을 이끌고 왔다고 하는데, 그에 맞서는 동천왕은 2만의 병력으로 맞서 싸웁니다. 그런데, 동천왕이 말하기를 관구검의 군사가 더 많다고 합니다. 이상하지요? 해당 내용에 대해 검색을 해 봤는데, 삼국지 정사에는 관구검이 2차례 고구려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기록이 애매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구검이 고구려를 이기고 후(侯)로 봉해진 자가 100여명이나 되었다고 단재 신채호 선생도 비판을 하셨다고 합니다. 삼국연의 보시면 관우가 한수정후인가 그렇지요? 아무나 후(侯) 봉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고구려를 공격한 당시 위나라 군사가 상당했..

삼국사기 권 16 고구려본기 4 원문

삼국사기 권 16 고구려본기 4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고구려본기 4에서는 그닥 의아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한 가지를 제외하면요. 아래 스크린샷을 보시면 중국에 큰 난리가 나서 한나라 유민이 대거 피난을 왔다고 적혀 있는데 피난을 온 종착지는 기록에 없습니다. 그 곳이 고구려인지 백제인지 그도 아니면 신라인지, 그러나 고구려본기의 일부이므로 어쩌면 고구려에 유입된 이민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지역에서 거주하다 전란을 피해 온 사람들이 중국 한(漢)나라 사람들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깁니다. 업로드는 고구려본기 4를 올렸지만 고구려본기는 대충이라도 어쨌거나 이미 다 읽어보았는데 고구려본기 10 끝에 김부식..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3 원문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3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태조대왕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대방령을 죽였다고 나옵니다. 현재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말하는 대방은 요동이 아니라 황해도입니다. 제가 주석에 붙여써 놓은 것은 요동의 위치가 어디냐 하는 것 때문인데? 요동이 현재의 요동이라고 해도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대방을 황해도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 안되고, 고구려 시대의 요동은 어디인지 알지 못하며 고려시대에 인식하던 요동 역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동은 시기별로 그 위치가 달랐다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고구려 역사에는 장수왕이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드님 되시지요. 얼마나 오래 사셨는지 장수왕이라고 후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