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원문/삼국사(삼국사기) 55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2 원문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2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신라본기에는 북명이라는 곳이 제가 보는책에는 강릉이라고 지명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무신왕을 도와 종군한 괴유가 죽자 그를 북명산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도읍한 지역은 한반도 밖입니다. 만주와 한반도 사이에 백두산이 놓여 있는 것 아시지요? 백두산의 현재 높이기 2744M 인가 그렇습니다만 고구려 시대에는 더 놓았을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백두산은 화산입니다. 백두산 천지에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진 연못이 있고 그 연못을 천지(天池)라고 부릅니다. 대진고려(발해)가 망한 원인도 백두산 화산 폭발일 수도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서기 950년 쯤에 백두산 화산이 폭발했다고..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1 원문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1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신라본기가 12권에 기록된 반면 고구려본기는 10권입니다. 보통 우리가 배운 역사대로라면 고구려의 영토가 훨씬 넓고 북방 여러 민족들의 변화 역시 잦았으므로 고구려본기가 더 내용이 많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이건 삼국사기를 원문으로 읽으려고 하면서 느낀 의외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고구려가 훨씬 더 넓고 한나라와 기타 선비족이 세운 나라들과의 교류도 있었고 멀리는 돌궐 등과도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내용이 더욱 풍부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아래 스크린 샷에서 부여왕으로 표시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신라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의 순서로 최고 통치..

삼국사기 권 12 신라본기 12 원문

삼국사기 권 12 신라본기 12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관심법의 주인공 궁예와 견현, 고려 태조가 다투는 후삼국시대 이야기이고 경애왕이 견훤에게 봉변을 당한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한 가지 연해주가 나오는데 삼국사기에 나오는 연해주는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현재의 연해주를 말하는 것이라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강역이 가장 넓었을 것인데 하필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에는 그런 지도를 채택을 안하지요? 본문도 연해주의 부락들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해왔다고 적혀 있으므로 현재 국사교과서에 표시된 고려 강역도 어느 사료를 보고 그린 것인지 더욱 궁금하네요. 땅따먹기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동향, 뭐 그런 것을 모르는데, 일개 서민이..

삼국사기 권 11 신라본기 11 원문

삼국사기 권 11 신라본기 11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올리고 보니 파일 이름이 잘못 되었네요. 권 12가 아니라 권 11 입니다. 신라본기 11에 최치원이 당나라 과거에서 급제한 내용을 쓰고 있습니다. 조선상고사를 읽어보면 최치원을 당나라 유학생이라고 하면서 단재 신채호 선생이 못마땅해 하는 부분이 있는데, 고려시대 당시로서는 어쩌면 우리 전래의 풍습이나 사상보다 중국의 학문이나 습속을 우월한 것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 최치원이 난랑비 서문을 썼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또 묘합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태어난 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가 고려시대에 편찬되어서 적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것이 918년..

삼국사기를 원문으로 보면서 알게 된 것들...

요즘 삼국사기를 원문으로 읽어보려고 용쓰고 있습니다. 제가 삼국사기를 원문으로 읽게 되는 날이 있을 줄 저 자신도 몰랐습니다. 물론, 한문에 익숙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이 이상하다는 비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원문으로 읽을 수 있다면 원문으로 읽어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자를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문 고전을 꾸준히 읽은 것도 아니면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삼국사기를 원문으로 읽으려 하면서 구입한 책은 명문당 판 삼국사기 입니다. 20여년 전에 나온 책이에요. 이병도 역주본도 있고 기타 새로 나온 역주본도 있었는데,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AD42년에 건국되었다는 가야가 3세기나 4세기에 건국되었다는 희안한 이야기도 알게 되었습니다. ..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10 원문 (고사기와 일본서기)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10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ODT) 파일입니다. 신라본기에 북국(北國)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북국이 어딘지 얼른 연상이 되지 않았는데 발해(대진고려)라고 해설이 되어 있네요. 아래 스크린샷에서는 고구려승(고구려의 승려) 라는 부분을 캡쳐한 것이지만, 발해(대진고려)를 북국(北國)으로 표시한 것은 한 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드라마 상의 설정인지 모르지만 북방의 패자(覇者) 뭐 그런 말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신당연합군(나당연합군)과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패한지 150여년이나 지났는데도 고구려 승려라고 적힌 것이 의아해서 의문점을 옆에 주석 부분에 써 두었습니다. 고구려가 패했는데 고구려 승려라고... 서기 670년에 왜..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9 원문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9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 파일(ODT)입니다. 삼국사기에 인삼(人蔘)이 나옵니다. 아래 스크린샷에 인삼이 나오는데 739년조 기사 이전에도 인삼이 나옵니다. 하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읽다가 몇 년조에 나오는 기사인지 모르겠네요. 보통 인삼을 고려인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인삼을 재배하거나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하지 않았나 뭐 그런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려시대가 시작된 918년보다 200년이나 앞서 삼국시대부터 인삼을 재배한 것인지가 갑자기 떠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시대의 인삼이 재배한 인삼인지 아니면 당시에는 산삼을 인삼이라고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재배한 삼을 인삼이라고 하고 산에서 자연적으로 자란 것을 산삼..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8 원문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8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 파일(ODT)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AD670)에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본기 8에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합니다. 204명이나 되어서 기록을 했나 봅니다. 스크린샷 아랫 부분을 보면 가물었다며 旱 한 글자만 적었습니다. ㅡ,.ㅡ 갑자기 생뚱맞게 느껴지지 뭐겠습니까. 한편, 왜가 일본으로 국명을 바꾼 이후 삼국사기에는 일본국(日本國)으로 표기를 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규모를 갖추고 의전도 갖추었다는 그런 뜻일까요? 기타 기근이 나서 6개월동안 백성들에게 곡실을 나눠주기도 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곡식 저장을 많이 했나 봅니다.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7 원문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7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 파일(ODT) 파일입니다. 신라본기 7은 문무왕 上편으로 설인귀의 편지와 문무왕의 편지가 몹시 깁니다. 나당연합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이겼지만 영토분쟁이 발생했는지 설인귀가 문무왕을 그러면 안된다! 면서 마음을 돌리라 뭐 그러는 내용입니다. 반면, 문무왕이 당나라 군사가 축낸 식량이 적지 않으며 싸움에는 적극적이지도 않았고 이러면서 답서를 씁니다. 실제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한 뒤 신라도 흡수하려 소정방을 계림도독부에 명했다는 무슨 비석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을 모르지만 신라 측에서 당나라의 의중을 간파하고 선수를 친 것 같네요.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6 원문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6 원문입니다. 한글(HWP) 파일 아닙니다. 리브레 오피스 파일(ODT)입니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구한 것인데 한자로 변환되지 않은 것도 있고 해서 글자를 추가하거나 고친 것도 있습니다. 즉, 실제 원문과는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6은 문무왕 때인데 길어서 년도별로 책갈피를 해 두었습니다. 아래 부분은 고구려를 이기고 논공하면서 상을 주는 부분입니다. 장수들에게 상으로 준 곡식을 합치니까 쌀이 2700석, 조가 2200석 뭐 이렇게 나오더군요. 도정한 쌀인지 아니면 벼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1석을 보통 두 가마로 알고 있습니다. 옛날 신라의 도량형을 알지 못하니 조금 갑갑하네요. 전쟁통에 먹었을 것이고, 요즘처럼 곡식을 수입하거나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